기후대응·탈탄소화 등 국제사회 친환경 의제를 주도해 온 유럽연합(EU)의 기조가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감지됐습니다.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각) 본격 출범한 새 EU 집행위원회가 역내 산업 보호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전보다 더 강화된 보호무역 정책을 꺼내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규제 간소화’까지 언급하고 나섰습니다.
연임에 성공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EU 역내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규제 간소화와 함께 대규모 투자가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지난달 27일 유럽의회 본회의 연설에서 잘 드러납니다. 당시 유럽의회에서는 새 집행위 출범을 위한 표결이 진행됐습니다. 재적 688명 의원 가운데 370명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반대는 282표, 기권은 36표였습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연설에서 “혁신, 탈탄소화, 안보를 근간으로 EU가 나아가야 한다”고 피력했습니다.
폰데어라이엔 2기 체제, EU 보호할 ‘경쟁력 나침반’ 발표 🧭
새 집행위의 임기는 오는 2029년까지입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새 집행위가 추진할 첫 번째 이니셔티브도 공개했습니다.
이른바 ‘경쟁력 나침반(Competitiveness Compass)‘ 이니셔티브입니다. 크게 ①미국·중국과의 혁신 격차 해소 ②탈탄소화·경쟁력 강화 위한 공동계획 ③EU 안보 강화·의존도 감소를 목표로 합니다
이는 마리오 드라기 전(前)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작성한 ‘EU 경쟁력의 미래’의 보고서 속 3가지 축을 기반으로 마련됐습니다. 보고서에서는 EU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탈탄소화 전략 강화 ▲산업 구조 혁신 ▲안보 강화 ▲대규모 투자자금 조성 등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됐습니다.
드라기 전 총재는 EU가 미국·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역내 국내총생산(GDP)의 약 5%에 달하는 최대 8,000억 유로(약 1,180조 원) 규모의 신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미국, 중국과의 (기술)혁신 차이를 메우고 탈탄소화와 경쟁력을 위한 회원국 간 공동계획, 안보 강화 및 대외 의존도를 줄이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니셔티브 속 3가지 목표는 새 집행위에 합류한 집행위원들이 각각 맡아 새로운 계획을 내놓습니다. 집행위원은 행정부로 치면 국무위원에 해당합니다. 정책·법안을 제안과 EU 재정 관리나 긴급조치조항 운영권 등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집행위원장을 포함해 총 27명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지역·성별·담당 업무를 고려해 EU 27개 회원국에 1자리씩 할당됩니다.
1️⃣ 미국·중국과의 혁신 격차 해소
이는 연구·혁신·기술개발·과학을 경제발전의 핵심요소로 관련 투자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EU 역내 중소기업·스타트업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역시 목표입니다.
EU의 특허 출원 세계 점유율은 미국·중국과 비슷합니다. 단, 상업적 활용 비율은 3분의 1에 불과합니다. EU 내 스타트업 창업 건수는 미국과 비슷하나, 성장과 확장에서는 27개 회원국 간의 장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어 기업들의 성장에 유리한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집행위의 설명입니다.
이에 EU 역내 스타트업 성장과 연구 혁신은 예카테리나 자하리예바 집행위원이 총괄합니다.
새 집행위는 EU가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술 분야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첨단기술 개발의 중심지가 돼야만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에 헨나 비르쿠텐 수석 부집행위원장(기술자립·안보·민주주의 담당)을 주축으로 기술주권 강화를 위한 계획이 추진됩니다.
2️⃣ 탈탄소화·경쟁력 강화 위한 공동계획
폰데어라이엔 1기 체제(2019~2024년)에서는 탈탄소화와 녹색전환 달성을 위해 ‘EU 그린딜’이 발표됐습니다. 2050년 기후중립 달성을 위한 사회·산업 전반에 걸친 탈탄소화 로드맵입니다.
이제는 로드맵 이행에 집중하겠다는 것이 새 집행위의 계획입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역시 EU 차원의 탈탄소화 공동계획 수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는 EU의 에너지 대외의존도와 높은 에너지가격 해소를 목표로 합니다. 동시에 역내 청정기술 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골자로 합니다.
이는 차기 집행위가 내놓을 ‘청정산업협정’과 연결됩니다. 산업계 온실가스 배출량 억제 노력을 지원하는 동시에 EU 역내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르면 2025년 2월에 구체적인 윤곽이 나올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새 집행위에 합류한 테레사 리베라 수석 부집행위원장(청정·공정·경쟁 담당)이 청정산업협정 설계를 담당합니다. 스페인 부총리 겸 친환경전환부 장관 출신인 리베라 수석 부집행위원장은 유럽 내 기후전문가로 유명합니다.
스테판 세주르네 수석 부집행위원장(번영·산업전략 담당) 역시 탄소중립산업법(NZIA)을 비롯해 신산업정책을 총괄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법은 탄소중립 기술과 관련된 EU 역내 산업 제조 역량을 2030년까지 4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세계 청정기술 시장에서 EU 기업의 점유율을 15%까지 높이는 것입니다.
붑커 훅스트라 집행위원(기후·탄소중립 담당)은 기업들이 탈탄소화 과정에서 직면한 어려움의 해결책을 마련합니다.
에너지가격 문제 해소는 댄 요르겐센 집행위원(에너지·주택 담당)이 담당합니다. 그가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낮추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고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밝혔습니다.
한편, 블룸버그통신은 새 집행위가 청정기술을 포함한 자국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세부정책 방안을 오는 2025년 1월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전했습니다. 해당 계획은 ‘경쟁력 제고(Competitiveness Compact)’란 이니셔티브로 알려졌습니다.
3️⃣ EU 안보 강화·의존도 감소
이 역시 청정기술 육성과 연계돼 있습니다.
녹색전환에 따라 리튬·구리 등 핵심광물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원자재 공급망을 다각화하겠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자유로운 무역환경을 조성한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외무장관 격인 외교안보 고위대표 겸 수석 부집행위원장인 카야 칼라스 전 에스토니아 총리가 전반적인 협상을 이끕니다. 요제프 시켈라 집행위원(국제협력 담당)은 지속가능한 개발과 국제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투자 추진과 전략을 총괄합니다.
이는 EU의 ‘글로벌 게이트웨이(Global Gateway)’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이 이니셔티브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带一路)에 대응하는 EU의 개발도상국 기반시설 건설 프로젝트입니다.
현재 EU는 해당 이니셔티브를 통해 아프리카에 청정수소 생산시설 건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EU 새 집행위, ESG 규제 간소화 예고 ⚖️
한편, 새 집행위는 과도한 규제 대응하고자 전반적인 규제를 간소화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중에서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제 간소화가 언급됐습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유럽의회 연설에서 “기업들은 규제 부담이 무거운 짐이라 말하고 밌다”며 “보고도 너무 많고, 중복도 너무 많다”고 꼬집었습니다. 이어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규칙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 ▲EU녹색분류체계(이하 EU 택소노미)를 간소화하는 입법 절차를 개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CSRD는 EU의 대표적인 ESG 공시입니다. CSDDD는 기업의 공급망 내 인권·환경 실사를 골자로 합니다. EU 택소노미는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을 정의하기 위한 EU의 분류체계입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두 번째 임기 중 3가지 정책을 통합하거나 간소화한다는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EU 기업의 보고 의무를 25%까지 줄이는 것입니다. 공급망 실사 등에 따른 중소기업이 지는 부담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3개 정책이 가지고 있는 핵심요소는 유지하되, 기업들의 행정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여러 규정을 일괄적으로 수정한다는 겁니다. 단, 전면적 규제 완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산업·경제계는 이같은 규제 간소화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EU의 기술적이고 세부적인 규제가 혁신 투자와 환경목표 달성에 오히려 비효과적이란 주장입니다.
반면, 금융계와 환경단체에서는 규제 간소화 움직임이 EU의 지속가능성과 탈탄소화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았습니다. 프랑스 아문디자산운용사 등 유럽 내 주요 자산운용사들은 ESG 펀드 규모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