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 둔화, 인구감소, 주요국 간의 경쟁력 격차 확대 등에 직면한 유럽연합(EU)이 자국 경쟁력 강화를 위한 분석 보고서를 하나 내놓았습니다.
마리오 드라기 전(前)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작성한 ‘EU 경쟁력의 미래’란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올해 9월 처음 공개됐습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 재정위기 당시 과감한 통화 완화 정책을 펼친 인물입니다. 덕분에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들)의 위기 전이를 막아낸 경제 전문가로 꼽힙니다. 328쪽 분량의 이번 보고서는 드라기 전 총재를 주도로 EU 관계 기관들이 대거 참여해 작성했습니다.
드라기 전 총재는 보고서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운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이전의 국제사회 패러다임이 사라지고 있다. 급속한 세계무역 성장의 시대는 지나갔고, EU 기업들은 해외에서 더 큰 경쟁과 해외 시장에 대한 접근성 저항에 직면해 있다. 이 가운데 유럽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 공급자인 러시아를 잃었다. 지정학적 안전성은 약해지고 있고, EU의 의존성은 취약성으로 판명됐다.”
EU 노동인구, 2040년까지 年 200만명 ↓…미래 위협 🤔
8일 보고서 전문을 살펴본 결과, 드라기 전 총재는 보고서 전반에서 EU의 경쟁력이 둔화했다는 점을 꼼꼼하게 짚습니다.
지정학적 불안정성 이외에도 기술변화 가속화와 기후문제도 중점적으로 언급됐습니다. 그는 “유럽은 인터넷이 주도한 디지털 혁명과 생산성 향상을 크게 놓쳤다”며 “세계 50대 기술 기업 중 유럽 기업이 4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인구감소 문제도 언급됐습니다. 보고서는 EU의 성장 둔화가 노동생산성 저하에 기인하는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미래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EU의 목표 달성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언급됐습니다.
EU의 노동생산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미국의 22% 수준에서 1995년 95%까지 상승했습니다. 이후 미국보다 더 큰 폭으로 둔화해 2010년대에는 미국의 80% 수준까지 하락했습니다.
▲노동인구 감소 ▲디지털 경쟁력 확보 지연 등이 노동생산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언급됐습니다. 유럽 내 노동인구는 인구감소로 인해 2040년까지 매년 약 200만 명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청정기술 육성, EU 신성장동력…불안요소 ‘중국’ 의존 🧪
보고서는 EU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①탈탄소화 전략 강화 ②산업 구조 혁신 ③안보 강화 ④대규모 투자자금 조성 등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됐습니다.
특히, EU 차원의 탈탄소화 공동계획 수립의 필요성이 강조됐습니다. EU의 에너지 대외의존도와 고에너지 비용 해소를 목표로 합니다. 동시에 EU 청정기술 업계의 경쟁력 강화에 방침을 둡니다.
청정기술 산업을 EU의 신성장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차기 EU 집행위원회가 내놓을 ‘청정산업협정’과 연결됩니다. 산업계 온실가스 배출량 억제 노력을 지원하는 동시에 EU 역내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보고서는 청정산업협정에 담겨야 할 주요 권고사항이 담겼습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청정기술이 EU 산업의 성장 기회가 될 것이란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보고서는 EU가 풍력터빈·전해조 등 청정기술 분야의 선두주자란 점이 강조됐습니다. 청정기술의 5분의 1가량이 유럽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시에 청정기술 육성 정책이 EU의 기후목표와 궤도를 같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포함됐습니다. 이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탈탄소화가 오히려 경제성장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이 크다고 그는 우려했습니다.
불안요소도 담겼습니다. 바로 중국입니다.
태양광·배터리·전기자동차 등 중국 청정기술 업계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정책과 막대한 보조금 그리고 기술개발 덕분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3개 산업(태양광·배터리·전기차)의 중국 내 투자가 6,750억 달러(약 9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EU의 탈탄소화 목표 달성에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인 경로를 제공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동시에 중국 의존도가 높아진 것이 EU의 청정기술과 자동차 산업을 모두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AI 등 신기술 기술격차 해소…공급망 다각화 주문 🌐
이 때문에 보고서는 EU가 ‘중등 기술 함정(Middle Technology Trap)’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혁신과 생산성이 낮은 자동차 등 성숙한 기술 부문을 중심으로 한 경제를 말합니다.
그 대신 인공지능(AI) 등 신흥기술 분야에서 주요국과 기술격차를 축소해야 한다는 내용이 강조됐습니다.
최근 20년간 EU의 연구개발(R&D)은 주로 자동차 산업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반면, 미국은 R&D 투자가 자동차에서 소프트웨어로 전환한 상태입니다.
이는 기업의 생존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실제로 지난 13년간(2008~2013년) 유럽에서 창업한 유니콘 기업 중 30%가 해외로 본사를 이전했습니다.
EU가 AI와 청정기술 같은 미래 핵심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할뿐더러,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 유치를 시급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 보고서에서 강조됐습니다. EU 차원의 반도체 전략 수립의 필요성도 언급됐습니다.
산업 구조를 탈탄소화와 신기술에 맞춰 혁신하기 위해서는 핵심광물 등 자원의 공급망 다변화가 필수입니다. 기술 자립성도 확보해야 합니다. EU 차원의 안보 강화가 포함된 이유입니다.
실제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연임 성공 직후 ‘유럽방위동맹(European Defence Union)’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한국 등 해외 파트너국과의 협력도 강조됐습니다. EU의 ‘글로벌 게이트웨이 이니셔티브(Global Gateway Initiative)’를 발전시켜 한국·일본·호주 등과 적극적으로 자원외교 부문에서 협력해야 한단 것을 골자로 합니다.
핵심광물 공급망 안정성을 위해 심해채굴을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도 부분적으로 언급됐습니다.
年 최대 8000억 유로 신규 투자 필요, 유로본드 발행 ↑ 💸
문제는 결국 돈입니다.
보고서는 EU가 미국·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연간 최대 8,000억 유로(약 1,185조원) 규모의 신규 투자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2023년 EU 국내총생산(GDP)의 4.7%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서유럽 재건 원조 계획인 ‘마셜플랜’과 비교해도 큰 액수입니다. 마셜플랜으로 지원된 액수는 당시 유럽 GDP의 약 2% 수준입니다. 세계대전 직후 전후 폐허가 됐을 당시보다 2배 이상의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에 유로존 차원의 공동 국채, 일명 ‘유로본드’를 적극 발행하는 등 자금조달을 혁신해야 한다는 제언이 담겼습니다.
보고서는 이 모든 개혁이 민주적으로 지지를 받을 때만 추진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EU 경쟁력 보고서, 한국에 시사하는 바 커 🤔
보고서가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한국 역시 저성장과 인구감소 속에 성장률 제고를 위한 속도감 있는 혁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KDB미래전략연구소 산업기술리서치센터 역시 이 점을 언급했습니다. 기관은 “보호무역주의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도 노동력 감소와 첨단산업 글로벌 경쟁 강화, 공급망 리스크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전체 인구는 2022년 5,167만 명에서 2050년 4,711만 명으로 줄어들 전망입니다. 중위연령은 2022년 44.9세에서 2050년 58.1세로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인구감소 속도는 매년 빨라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은 중국 같은 특정국으로부터 원자재·중간재 수입의존도가 모두 높아 공급망 리스크도 취약합니다.
기관은 “한국이 직면한 문제에 대응하고 미래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실효성 있고 강력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확대되는 추세”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EU의 이번 보고서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한 한국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