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행정부의 기후산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발표된 투자 프로젝트 중 40%가량이 지연되거나 중단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자체 조사 결과 이같은 상황이 드러났다고 지난 12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습니다.
조사 대상은 ‘반도체 및 과학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 직후 발표된 미국 내 제조업 투자 사업입니다.
1억 달러(약 1,360억원) 규모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 114건이 조사됐습니다. 이들 프로젝트의 총규모는 2,279억 달러(약 310조원)에 달합니다.
그중 지연·중단된 프로젝트가 840억 달러(약 11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는 LG에너지솔루션(이하 LG엔솔) 등 한국 기업의 사례도 포함됐습니다.
16일 그리니엄이 추가로 확인한 결과,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성 고조와 행정절차 지연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습니다.
칩스법·IRA 영향? 美, 기후테크 투자서 中 따돌려 🇨🇳
칩스법은 미국 내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목표로 520억 달러(약 70조 7,500억원)를 지원하는 법안입니다. IRA는 기후대응과 의료보험 확대 등을 골자로 발표됐습니다. IRA 중 기후대응에 투자하는 자금은 3,690억 달러(약 505조원)에 달합니다.
이를 통해 자국 산업 생태계 조성은 물론 일자리 공급 확대와 기후대응까지 챙긴다는 것이 바이든 정부의 구상입니다. 중국 정부를 견제하다는 기저 역시 깔려 있습니다.
두 법 모두 2022년 8월에 발효됐습니다. 두 법안이 시행된 작년 한해에만 2,200억 달러(약 299조원) 이상의 제조업 투자가 발표됐습니다. 같은해 유럽연합(EU)이 투자 유출을 막기 위해 ‘넷제로산업법(NZIA)’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최근 블룸버그NEF(BNEF)의 분석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기후테크 자금조달에서 미국은 중국을 앞질러 1위를 차지했습니다.
미국은 67억 달러(약 9조원)를 모은 반면, 중국은 51억 달러(약 6조 9,315억원)에 그쳤습니다. IRA를 등에 업은 미국은 기후테크에 유리한 시장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 BNEF의 분석입니다.
전기차·배터리·태양광 40% 지연·중단…”韓 기업도” 🇰🇷
그런데 FT의 이번 조사 결과는 미 기후산업 정책의 실상이 그렇게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체는 기업·주정부·지방자치단체 등 100여곳을 취재한 결과,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프로젝트 지연·중단 사례를 여럿 발견합니다.
한국 자동차 부품 제조사 ‘삼기’가 사례로 소개됐습니다. 1억 2,800만 달러(약 1,741억원)를 투자해 지난 6월 미 남부 앨라배마주에 첫 미국 공장을 개장했습니다. 매체는 사측이 전기자동차 수요 감소로 인해 전기차 생산라인 추가를 1~2년 연기한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지연·중단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전기차·배터리
① LG에너지솔루션
먼저 LG엔솔은 지난 6월 애리조나주 배터리 생산시설 중 에너지저장장치(ESS) 생산라인 건설을 중단했습니다. 생산라인 착공 2달여만입니다. 해당 공사에는 23억 달러(약 3조원)가 투자될 계획이었습니다.
사측은 “시장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함”이라며 일시적 중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국 및 유럽 공장에서 전기차용 배터리 라인 일부를 ESS 생산으로 돌린 영향으로 풀이됩니다. LG엔솔은 전기차 수요 둔화로 ESS 생산에 집중하는 모양새입니다.
이에 따라 전기차용 및 ESS 배터리 생산시설을 포함한 애리조나 공장의 전체 투자 금액은 3분의 1가량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단, 같은 시설 내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 건설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② 앨버말
세계 최대 리튬생산 기업 앨버말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투자도 보류됐습니다. 앨버말은 13억 달러(약 1조 7700억원) 규모의 리튬 정제시설을 건설할 계획이었습니다. 해당 계획은 무기한 연기된 상황입니다.
최근 앨버말은 실적 악화로 인해 호주 생산시설 확장도 중단했습니다.
③ 리어코퍼레이션
미국 자동차 부품 제조사 리어코퍼레이션은 2022년 전기차 부품 생산에 1억 달러 이상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이중 8,000만 달러(약 1,088억원)를 투자한 생산시설은 올해 가동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약속한 나머지 금액은 아직 투자 집행이 진행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④ 아노비온
미국 배터리 소재 제조사로 조지아주에 총 8억 달러(약 1조원) 규모의 생산시설을 세울 계획이었습니다. ‘초당적 인프라법(IIJA)’에 따라 1억 1,700만 달러(약 1,591억원)의 보조금 지원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공장 건설은 1년 이상 연기됐습니다.
🌞 태양광
① 에넬
다국적 에너지 기업 에넬은 오클라호마주에 태양전지와 패널 생산시설을 건설을 발표했습니다. 당초 작년 가을 착공을 시작해 2024년 말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입니다. 연간 생산용량은 3GW(기가와트)로 10억 달러(약 1조 3,600억원)가 투자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착공 소식은 들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② VSK 에너지
인도 태양광 제조기업입니다. 2023년 콜로라도주 생산시설 건설에 2억 5,000만 달러(약 3,4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현재는 계획을 폐기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③ 맥시온솔라테크놀로지스
다국적 태양광 제조기업입니다. IRA 보조금을 기반으로 뉴멕시코주에 10억 달러 규모의 생산시설 건설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5월 대출 지연으로 인해 공장 착공이 연기됐습니다.
💧 청정수소
노르웨이 전해조 생산업체 넬하이드로젠은 미시간주에 4억 달러(약 5,441억원) 규모의 전해조 생산시설을 세울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작년 미국 정부의 청정수소 세액공제 기준 발표 이후 프로젝트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엄격한 기준이 제시되면서 세액공제 수령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많은 청정수소 및 전해조 생산 기업들이 투자를 늦추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지난 2월 ‘청정수소 허브(H2 허브)’ 7곳이 공동으로 세액공제 지침 개정을 요구하는 서한을 재무부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서한에는 지침 개정이 변경되지 않으면 프로젝트 중 다수가 진행되기 어렵다는 호소가 담겼습니다.
💽 반도체
한편, 반도체 기업들도 공장 건설을 다수 보류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TSMC는 지난 1월 애리조나주에서 진행되는 400억 달러(약 54조 4,10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 일부를 연기했습니다. TSMC는 “미국 정부가 얼마나 많은 세액공제를 제공할지를 검토하겠다”는 방침입니다.
TSMC의 공급업체 또한 해당 지역 내 시설 건설을 연기하거나 보류하고 나섰습니다.
대만 창춘석유화학의 3억 달러(약 4,081억원) 투자와 KPCT의 2억 달러(약 2,720억원) 투자 등이 포함됩니다.
산업계 투자 지연 이유 “문제는 정치야” ⚖️
기업들이 약속했던 투자를 중단한 이유는 산업 부문별로 다릅니다.
태양광의 경우 중국의 과잉생산과 가격 폭락, 이로 인한 수익 악화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힙니다.
전기차 부문은 수요 둔화의 영향이 큽니다. 이는 배터리 수요 둔화와 리튬 공급과잉으로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는 정치적 불안정성이 꼽힙니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IRA 폐지를 외쳐온 도널드 트럼프 전(前) 대통령의 지지세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불안정성에 많은 기업들이 11월 이후로 투자 결정을 늦추는 모양새입니다.
정책 자체의 불명확성과 행정 절차 지연도 기업들의 투자 결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IRA의 해외우려기업(FEOC) 세부조항과 청정수소 세액공제 기준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두 건 모두 지난해 12월에야 발표됐습니다. 시장조사기관 우드맥킨지는 청정수소 세액공제가 예상보다 늦게 발표됐다고 꼬집은 바 있습니다.
칩스법의 경우 신청 과정이 복잡할 뿐더러, 자금 승인까지 최대 100주가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