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정부가 해양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온실가스를 감축할 의무가 있단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권고적 의견이 지난 21일(이하 현지시각) 나왔습니다. 권고적 의견은 판결과 달리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국제해양법재판소의 이번 공식 의견이 한국 등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후소송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단 기대감이 모입니다.
국제해앙법재판소의 의견은 ‘기후변화와 국제법에 관한 군소도서국가위원회(COSIS)’의 요청에 따른 것입니다. COSIS는 투발루 등 9개 도서국으로 구성된 연합체입니다.
COSIS는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한 논의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2022년 12월 국제해양법재판소에 판단을 요구합니다.
COSIS가 재판소에 판단을 요구한 내용은 크게 2가지입니다.
첫째, 해양이 흡수한 온실가스를 해양 오염으로 간주할지입니다.
둘째, 만약 해양이 흡수한 온실가스를 오염으로 간주할 시 파리협정에 따라 당사국들은 어떤 예방·경감·방지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였습니다.
그 결과, 재판관 21인은 만장일치로 “대기에 인위적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건 (유엔해양법) 협약 의미 안에서 해양 환경오염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온실가스 해양오염 물질 맞아, 파리협정 당사국 감축 의무 있어” ⚖️
아울러 파리협정 당사국이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상 오르지 않도록 온실가스를 감축할 의무가 있단 내용도 담겼습니다.
육상과 선박에서 나오는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통제하기 위해 당사국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단 내용도 강조됐습니다.
당사국이 해양 환경오염 영향에 취약한 개발도상국을 재정적·기술적으로 지원해야 한단 문구 역시 판결문에 포함됐습니다.
또 유엔해양법협약 당사국은 기후변화와 해양산성화로 인한 환경 피해를 방지할 의무가 있단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1982년 채택된 유엔해양법협약은 해양의 이용과 관리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을 담고 있는 다자간 국제협약입니다. 한국 등 168여개국이 가입해 있습니다.
앨버트 호프만 국제해양법재판소장은 “국가는 기후변화와 해양산성화로부터 해양 환경을 보호하고 보존할 의무가 있다”면서 “해양 환경 악화 시, 해양 서식지와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해양산성화란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해양에 흡수되며 산성도가 높아지는 현상입니다. 산성화가 높아지면 해양의 탄소흡수능력은 떨어질뿐더러, 해양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미주인권재판소 등 국제재판소 판결에 영향 주나? 🤔
발표 직후 COSIS는 “군소도서국의 역사적인 법적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에젤레오프 아피넬 투발루 법무부장관은 “그간 도서국이 요구해온 기후정의의 실천인 동시에 역사적 순간”이라며 “주요 오염자들의 책임을 묻는 첫 번째 단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국제해양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은 ‘권고적 의견’으로 법적 강제성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재판소의 이번 권고적 의견이 주요 온실가스 배출국에게 더 적극적인 기후대응을 촉구하는 근거가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국제사법재판소(ICJ)와 미주인권재판소(IACHR) 등 주요 재판소에 비슷한 사건이 제기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재판소 모두 지난 4월 공개변론을 열고 청구인과 참여자들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된 사건은 2023년 3월 유엔총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제기됐습니다.
유엔은 각국 정부가 기후위기에 따른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국제법적 의무가 있는지 국제사법재판소에 권고 의견을 요청했습니다. 만약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법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알아보겠단 것입니다.
미주인권재판소 내 사건은 작년 1월에 제기됐습니다. 칠레·콜롬비아 등 남미 정부들은 재판소에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의 법적 의무를 명확히 해주라며 권고 의견을 요청했습니다.
특히, 미주인권재판소의 권고 의견은 미주 지역 법원들에게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단 점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카리브해 도서국 앤티가바부다의 가스통 브라운 총리는 영국 가디언에 “이들 3개 국제재판소가 공통된 목소리를 낸다면 기후대응을 촉구하는 상승효과를 낼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거부한 스위스 의회 법사위…“구속력 위한 조치 필요” 🏛️
물론 이들 재판소의 판단을 거부한 사례도 있습니다.
지난 4월 유럽인권재판소(ECHR)가 스위스 정부를 내린 판결이 대표적입니다. 이 판결은 스위스 정부가 기후대응 정책을 소홀히 해 고령자들의 인권을 침해했단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스위스 정부의 기후대응 노력 부족이 유럽인권조약상 생명권과 자율권에 대한 침해라고 판결했습니다.
허나, 판결 직후 한달여뒤인 지난 21일 스위스 의회 내 상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이 권한남용이란 선언문을 채택합니다.
물론 해당 선언문은 의회 상임위 내에서 채택된 것이지, 스위스 의회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요시치 법사위원장은 스위스 현지 언론에 “유럽인권재판소의 가치를 인정한다”면서도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명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그는 여름 회기 중에 스위스 상원이 선언문을 채택하길 원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스위스 환경단체 ‘기후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클럽’은 의회 법사위의 결정에 “인권은 정치적 다수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성토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제재판소들이 내린 판단이 법적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구속력을 보장할 후속 조치가 취해져야 한단 주장도 나옵니다.
전(前) 국제사법재판소장인 조앤 도너휴는 “국제재판소는 각국이 판결을 따라야만 권한을 발휘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5℃ 규범성 확립 사례”…韓 협약 당사국으로 권고적 판결 따라야 🗨️
한편, 국제해양법재판소의 이번 권고적 의견이 국내 기후헌법소원에도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립니다.
현재 헌법재판소는 4건의 기후소송을 병합해 심리 중입니다.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국가 온실가스를 40% 감축하기로 한 현재의 감축목표가 국민 기본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국제법 전문가인 최창민 변호사는 30일 그리니엄과의 인터뷰에서 “(국제해양법재판소의 판결은) 온도목표와 관련해 1.5℃의 규범성을 확립한 것”이라고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1.5℃는 국제사회가 2015년 파리협정을 통해 합의한 기온 상승의 마지노선입니다.
파리협정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2℃ 이내로 억제하고, 1.5℃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두 목표간 차이, 즉 0.5℃가 불러올 여파는 큽니다. 예컨대 지구 평균기온이 2℃를 넘으면 산호초는 절멸할뿐더러, 동식물의 멸종위험 역시 2배 이상 늘어납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 역시 지구 평균기온을 최대한 1.5℃ 이내로 유지해야 한단 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최 변호사는 “파리협정 채택 이후 IPCC 특별보고서와 기후총회 등을 통해 1.5℃ 목표의 규범성이 강화되고 있다”며 “국제해양법재판소의 권고 의견 역시 이같은 추세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국제해양법재판소의 이번 권고 의견이 한국을 포함한 각국 법원이 자국의 온실가스 감축정책과 목표가 충분한지 판단하는데 있어 국제법적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고 최 변호사는 밝혔습니다.
기후헌법소원 청구인 측 공동대리인단의 김영희 변호사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김 변호사는 “국제해양법재판소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상 오르지 않도록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있다고 했다”며 “한국도 협약 당사국으로서 이번 재판소의 권고적 판결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