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핵융합 기술개발 스타트업 잽에너지가 최근 1억 3,000만 달러(약 1,786억원) 규모의 신규 자금조달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회사 측이 지난 7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자료를 제출하면서 처음 전해졌습니다.
7일 데이터제공업체 크런치베이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잽에너지가 이번 자금까지 포함해 모은 투자금은 3억 3,780만 달러(약 4,640억원)에 이릅니다. 단, 사측은 이번 자금조달과 관련해 아직 별도의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빌 게이츠의 기후투자사 브레이크스루에너지벤처스(BEV) 역시 잽에너지에 투자한 이력이 있습니다. 로열더치쉘·셰브론·에니 등 굵직한 석유 기업들 역시 투자한 바 있습니다.
이들이 잽에너지에 투자한 이유는 바로 사측이 개발 중인 독특한 기술 때문입니다.
1억℃ 핵융합 반응, 어떻게 계속 유지할까? 🤔
잽에너지는 2017년 미 워싱턴주립대 물리학자들이 설립한 곳입니다. 이들 물리학자는 플라스마를 안정화시키는 작업을 주로 연구해 왔습니다.
장점은 기존 원자력발전과 비교해 방사성폐기물이 거의 발생하지 않을뿐더러, 희귀자원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온실가스 배출 역시 극히 적습니다.
단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적 난이도가 매우 크단 것입니다.
먼저 투입해야 하는 에너지가 큽니다. 현재 핵융합 발전으로 ‘순(純)에너지’를 생산한 곳은 미 에너지부 산하 로런스리버모어국립연구소(LLNL)뿐입니다. 순에너지란 에너지를 만드는데 소비한 에너지보다 발생한 에너지가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핵융합 상태를 만들기 위해선 1억℃ 이상의 플라스마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녹는점이 가장 높은 물질인 텅스텐도 3,400℃에 불과합니다.
관건은 뜨거운 플라스마를 어떻게 가둘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잽에너지는 자사의 기술이 “핵융합 발전에 필요한 플라스마 상태를 비용효율적으로 안정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잽에너지 “자석·레이저 없이 핵융합 반응 유도” ⚡
핵융합은 강력한 자기장을 사용하거나 레이저 광선을 쏘아 플라스마를 압축함으로써 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이 주로 연구돼 왔습니다.
다른 핵융합 스타트업의 경우 대개 ‘토카막(tokamak)’ 방식을 사용합니다. 강력한 자기장으로 플라스마를 가두는 방식입니다. 현재로서는 실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식이기는 하나 단점도 여럿 있습니다. 자기장을 만들기 위해 자석이 커야하고 비용과 에너지소비가 모두 크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잽에너지는 토카막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자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측은 ‘Z-핀치(Z-Pinch)’ 효과에 주목했습니다. 이는 고온 플라스마를 폭과 높이가 작은 공간에 가두는 효과를 말합니다.
사측이 연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발견됐던 것입니다. 1905년 이미 번개에서 처음 관찰됐습니다. 호주의 한 피뢰침에 번개가 내리치자, 강력한 자기장으로 인해 피뢰침이 골판지처럼 구겨졌습니다.
번개나 태양에서는 이같은 강력한 자기장이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자연에서는 플라스마의 수명이 매우 짧습니다.
즉, 자연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잽에너지는 수소 동위원소인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진공관에 주입되면 자체적으로 자기장을 형성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일명 ‘전단 유동 안정화 Z-핀치(sheared flow Z-pinch)’ 기술이 사용됐습니다.
에너지가 2m 크기의 진공관에 투입돼 전류가 흐르면 플라스마 주변으로 강력한 자기장이 생성됩니다. 이후 플라스마가 물질을 압축해 핵융합 반응에 충분한 조건을 만드는 형태입니다.
이때 들어간 플라스마 역시 다른 곳보다 에너지밀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존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는 핵융합 점화보다 더 간단하다는 것이 사측의 주장입니다. 사측은 워싱턴주립대와 LLNL 소속 물리학자들과 함께 관련 작업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m 크기 설비서 플라스마 온도 3700만℃까지 올려” 🧪
쉽게 말해 다른 스타트업과 달리 독자적인 기술을 기반으로 비용효율적인 핵융합을 만드는 것이 잽에너지의 목표입니다.
이들의 기술은 복잡해 보이나 상용화 가능성은 큽니다.
실제로 작년 5월 사측은 에너지부의 핵융합 개발 프로그램에 선정된 8개 기업 중 한 곳입니다. 잽에너지는 덕분에 500만 달러(약 68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10년 안에 기술·상업적으로 실현 가능한 핵융합 설비를 설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회사 공동설립자 겸 최고과학책임자(CSO)인 우리 슈물락 박사는 “(정부의 지원에 대해) 신뢰의 표시”라고 평가했습니다. 보조금 액수가 크지 않으나, 국가 차원에서 핵융합 기술개발에 명확한 신호를 줬다는 것이 슈물락 CSO의 설명입니다.
물론 난관도 많습니다. 당초 잽에너지는 2023년까지 핵융합 설비를 통해 순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는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올해 4월 자사의 소규모 핵융합 설비에서 플라스마 3,700만℃까지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2m 크기의 설비에서 플라스마 온도를 이정도까지 끌어올린 곳은 잽에너지 같이 소수에 불과합니다.
해당 연구 결과는 같은달 미국 물리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에도 게재됐습니다.
사측은 2024년을 순에너지 생산을 위한 원년으로 삼는다는 계획입니다. 회사에 인재가 증가한 영향도 있습니다.
자금조달 문제로 지난해 폐업한 핵융합 스타트업 CT퓨전의 공동설립자 4명 중 3명이 잽에너지로 이직했기 때문입니다. 이 스타트업 역시 워싱턴주립대에서 분사했습니다.
핵융합 투자 71억 달러 돌파…”자금조달 문제 우려도” 💰
잽에너지는 2030년까지 미국 전력망에 자사의 핵융합 설비를 연결한다는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석유 기업들 역시 잽에너지의 성패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예컨대 셰브론 산하 셰브론테크놀로지벤처스는 2020년 잽에너지의 시리즈 A에 투자를 집행한 바 있습니다. 당시 회사 사장이던 바바라 버거는 “핵융합 기술을 유망한 저탄소 미래에너지원으로 본다”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한편, 미 실리콘밸리은행은 기후테크 산업 내에서 올해 전환점을 맞을 분야로 핵융합을 꼽은 바 있습니다.
미 핵융합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핵융합 투자는 약 71억 달러(약 9조 7,660억원)에 이릅니다. 전년 대비 9억 달러(약 1조 2,380억원) 이상 늘어난 것입니다.
협회 조사 결과, 세계 핵융합 기업 수는 45개입니다. 3개 스타트업이 새로 추가됐고, 1곳은 폐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현재 4,000여명 이상이 핵융합 기업에 근무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앤드류 홀랜드 협회장은 “지난 12개월간의 성장은 긍정적”이라면서도 “핵융합을 위한 야심찬 목표 달성을 위해선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협회가 45개 핵융합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자금조달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답한 비중이 66%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