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 끝에 유럽연합(EU) 이사회가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을 승인했습니다.
EU 상반기 의장국인 벨기에 정부는 지난 15일(이하 현지시각)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CSDDD 수정안이 통과됐다고 밝혔습니다. 27개 회원국 중 17개국이 CSDDD 수정안 통과를 지지했습니다.
일명 ‘공급망실사법’으로도 불리는 CSDDD. 인권과 환경에 대한 기업의 실사 및 정보 공개 책임을 의무화하는 법안입니다.
EU 이사회를 통과함에 따라 CSDDD 채택을 위한 마지막 관문은 유럽의회 승인만 남아있습니다.
그리니엄이 이번에 통과한 CSDDD 최종안을 살펴본 결과, 적용 기업의 연매출이 초안보다 3배나 상향 조정됐습니다. 쉽게 말해 법안 대상 기업이 대폭 축소됐단 말입니다.
여기에 패션·식품·원자재 등 환경·인권 영향이 큰 산업은 중기업까지 적용 대상으로 둔다는 대목도 삭제됐습니다.
지연·무산 위기 겪은 CSDDD, 벨기에 조율 덕에 극적 타결 🇧🇪
CSDDD에 따르면, 기업은 전체 공급망에서 인권·환경에 대한 실사를 이행해야 합니다. 또 관련 내용을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기업에게 공급망 내 강제노동, 삼림벌채 등의 인권·환경에 대한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할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규정 위반 시 연매출의 최대 5%까지 벌금이 부과됩니다.
한국을 비롯한 비(非) EU 국가도 조건 충족 시 CSDDD 적용 대상에 포함됩니다.
앞서 CSDDD 표결은 독일·이탈리아 등 주요국의 반대로 지난 2월 9일과 14일, 그리고 이달 8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무산된 바 있습니다.
이에 통과 직전까지도 CSDDD 법안이 사실상 폐기 수순이란 전망도 나왔습니다. 현(現) 유럽의회의 회기가 이르면 4월 마감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회 승인은 CSDDD 도입을 위한 최종 절차입니다.
그러나 표결 전날(14일) 벨기에 정부가 수정안을 내놓으며 EU 이사회는 극적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적용 기준의 대폭 상향해 기업들의 부담을 줄인 것이 핵심입니다.
로이터통신은 주요 반대국인 독일·이탈리아가 “경제가 소규모 기업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기업 대부분을 제외하도록 추진”한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같은날 이탈리아가 반대했던 ‘EU 포장재 폐기물 지침 강화 개정안(PPWR)’이 완화돼 EU 이사회를 통과한 것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완화된 CSDDD 최종안, 어떻게 바뀌었나? 📜
18일 그리니엄이 EU 이사회를 통과한 CSDDD 최종안을 살펴본 결과, 초안 대비 후퇴한 것으로 보이는 항목이 다수 발견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CSDDD의 적용 대상 기업은 초안 대비 급감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비영리 연구소 다국적기업연구센터(SOMO)에 의하면, 최종안에 따른 적용 대상 기업은 5,421곳으로 추산됩니다. EU 전체 기업의 약 0.05%에 불과합니다.
1만 6,389개 기업이 적용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초안과 비교하면 67% 감소한 수치입니다.
1️⃣ 적용 기준 대폭 상향
당초 초안에서의 적용 기준은 ▲직원 수 500인 이상(역내) ▲순 매출* 1억 5,000만 유로(약 2,176억원) 이상 대기업이었습니다.
최종안에서는 그 기준이 ▲직원 수 1000인 이상(역내) ▲순 매출 4억 5,000만 유로(약 6,526억원) 이상 기업으로 훌쩍 뛰었습니다.
초안 대비 직원 수 기준은 2배, 매출액 기준은 3배 증가한 것입니다.
*EU 기업은 전 세계(EU기업) 매출 기준이며 비EU기업은 EU 역내 매출 기준. 이하 동일.
2️⃣ ‘고영향 산업’ 적용 삭제
초안에서는 위 기준의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특정 부문의 역내외 중기업에도 CSDDD를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인권과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큰 부문, 일명 ‘고영향 산업’입니다. ▲섬유·가죽 생산 및 유통 ▲옷·신발 등 패션 ▲농축수산·식품업 ▲원유·천연가스 등 원자재 생산 ▲철강 생산·유통 등이 해당됩니다.
매출이 2,000만 유로(약 290억원) 이상인 역내외 중기업도 고영향 산업이면 CSDDD를 적용받을 예정이었습니다.
IBK경제연구소는 앞서 한국의 EU 수출 중소·중견기업 중에서도 고영향 산업에 포함될 국내 수출 기업이 110곳에 달한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통과한 최종안에서는 이 내용이 전부 삭제됐습니다.
3️⃣ 적용 시점 세분화
초안에 따르면, 적용 기준에 해당하는 역내외 대기업은 발효 4년 후부터 CSDDD를 적용받을 계획이었습니다. 최종안에서는 CSDDD 적용 시점이 기업 규모에 따라 세분화해 단계적으로 시행됩니다.
- 발효 3년 후|직원 수 5,000명·순 매출액 15억 유로(약 2조 1,760억원) 이상
- 발효 4년 후|직원 수 3,000명·순 매출액 9억 유로(약 1조 3,000억원) 이상
- 발표 5년 후|직원 수 1,000명·순 매출액 4억 5,000만 유로(약 6,530억원) 이상
환경·인권단체 “반갑지만 아쉽다” vs 기업 “여전히 부담” 💬
CSDDD 최종안에 대한 평가는 환경·인권 단체와 산업계 모두 부정적입니다.
세계자연기금(WWF) 유럽지부는 성명을 통해 “(노동)착취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며 “EU의 약속과 입법부로서의 신뢰성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우쿠 릴레발리 WWF 지속가능금융 정책책임자는 “법안은 뼈만 앙상하게 남았으며, 대기업의 극히 일부만이 적용될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의 EU 경제정의 책임자인 마크 올리비에 헤르만 또한 “대기업을 달래기 위해 규정을 축소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옹호자라는 유럽의 입지에 타격을 입혔다”고 지적했습니다.
산업계도 이번 수정안에 대해 반발하는 모양새입니다. 기업들은 CSDDD가 완화됐긴 했지만 여전히 기업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경제단체 비즈니스유럽의 마르쿠스 베이러 사무총장은 “비할 데 없는 의무가 추가되고, 기업에 가혹한 제재가 가해짐으로써 기업이 세계의 소송에 일방적으로 노출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EU 기업이 글로벌 경쟁 기업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4월 예정된 CSDDD 입법 최종 단계, 유럽의회 통과 가능할까? 🤔
한편, CSDDD 제정까지 남은 절차는 유럽의회 비준뿐입니다. 유럽의회 본회의 표결은 오는 4월 중순 경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유럽의회 표결은 오는 6월 선거를 앞두고 열립니다. 회기 내 법안이 비준되지 않으면, CSDDD 제정은 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유럽의회 및 개편된 EU 집행위원회가 수행하게 됩니다.
이 경우 CSDDD가 원점에서 재검토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반(反) ESG(환경·사회·거버넌스)를 표방하는 극우·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CSDDD를 지지하는 측에 4월 내 유럽의회 통과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허나, 4월 유럽의회 투표에서 CSDDD가 통과될 수 있을지 여전히 불확실하단 우려가 나옵니다.
유럽의회 최대 교섭단체이자 중도우파 성향 정치그룹인 유럽인민당그룹(EPP)이 CSDDD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EPP 소속 안젤리카 니블러 독일 유럽의회 의원은 최종안이 여전히 소기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일부 기업이 개발도상국에서 철수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