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 법안 제정·시행이 잇달아 연기되면서 유럽연합(EU)의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기조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EU 이사회 상반기 의장국 벨기에가 이사회 상주대표회의에서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 최종 승인 표결을 연기한다고 지난 14일(이하 현지시각) 밝혔습니다.
해당 표결은 지난 9일 이미 한 차례 연기된 바 있습니다. CSDDD는 인권과 환경에 대한 기업의 실사와 정보 공개 책임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국내에서는 대개 ‘공급망실사법’으로 불립니다.
CSDDD는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와 함께 EU의 대표적인 지속가능성 법안으로 꼽힙니다. 이 가운데 유럽의회는 CSRD 산업별 공시기준 채택일을 2년 연기했습니다.
지속가능성 법안을 선도해 온 EU의 이같은 행보에 우려가 나옵니다.
EU 3자 협상 통과한 CSDDD, 돌연 좌초된 까닭 🤔
CSDDD 적용 대상 기업은 인권·환경에 대한 실사 요구사항을 설립하고, 실사 이행 뒤 관련 내용을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관련 규정을 위반할 시 연 매출액의 최대 5%가 벌금으로 부과될 수 있습니다.
여타 ESG 규정들이 기업의 정보 보고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달리, 이행을 강조했단 점에서 강력한 ESG 규제로 평가 받습니다.
기업 부담이 과중해진단 우려가 있으나 전문가 대다수는 CSDDD가 쉽게 발효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프랑스·독일 등 일부 EU 회원국이 자체적으로 공급망 실사에 대한 법률을 이미 도입했거나 준비 중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월에는 유럽의회·EU 이사회·EU 집행위원회의 3자 협상이 타결되며 입법이 기정사실화됐습니다. 남은 절차는 EU 이사회와 유럽의회의 승인을 거치는 것으로, 이는 통상 ‘형식적 절차’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지난 7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기권 입장을 표명하면서 승인이 불투명해졌습니다. EU 이사회 상주대표회의 표결은 회원국 수의 55% 이상, EU 전체 인구의 65% 이상이 찬성해야 합니다.
주요국의 기권으로 가결 요건 성립이 어려워진 것. 현재 CSDDD 법안의 추가 표결 날짜는 잡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선거의 해’ 발목 잡힌 CSDDD…6월 유럽의회 선거에 향방 불투명 🗳️
시작은 독일 의회의 자유민주당(FDP)이 기업의 과도한 부담을 우려하면서 반대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당은 작년 3월 EU의 2035년 내연자동차 금지 법안 제정에서도 막판 거부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시 법안은 EU 집행부와의 조건부 합의 덕분에 가까스로 통과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자유민주당이 EU의 친환경 법안에 딴지를 거는 이유가 선거 전략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독일은 올해 하반기 동부 3개 주 지방선거와 2025년 하반기 연방의회 선거(총선)를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연립여당인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은 부진합니다.
반면, 극우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은 현 독일 정부의 환경 정책에 대한 여론의 불만을 등에 업으며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에 자유민주당 또한 기업 친화적 입장을 부각해 지지도를 올리려는 전략이 아니냔 분석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이번 사태로 CSDDD 법안 자체가 좌초될 수 있단 관측도 나옵니다.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가 열리는 가운데 CSDDD가 통과되기 위해선 늦어도 4월 전까지 표결이 마무리돼야 합니다. 앞서 2035 내연차 금지 법안 제정 때처럼 막판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막판 협상에 실패할 경우 유럽의회 선거를 치르고 개편된 유럽의회 및 EU 집행위가 나머지 절차를 수행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반(反)ESG를 표방하는 극우·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CSDDD가 원점에서 재검토될 수도 있습니다.
유럽 지속가능법안 양대 축 CSRD 산업별 공시기준 시 2년 연기 📢
한편, EU의 또 다른 대표 지속가능성 법안인 CSRD도 시행에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지난 7일, 유럽의회는 산업별·비(非) EU 기업의 CSRD 공시기준 표준 제정을 2년 연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번 발표는 EU 집행위의 ‘유럽 지속가능성 공시기준(ESRS)’ 채택 유예안에 유럽의회와 EU 이사회가 합의한 결과입니다.
ESRS는 CSRD를 준수하기 위한 보고 기준입니다. 일반 ESG 공시 표준안이 담긴 1세트와 산업별·중소기업·비EU 기업 ESG 공시 표준안이 담긴 2세트로 구성됩니다.
작년 8월 ESRS 1세트가 확정됐고, 이에 따라 CSRD 일반 ESG 공시가 올해 1월 5일부터 적용됐습니다.
산업별 ESG 공시는 올해 6월 채택될 ESRS 2세트에 따라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허나, 같은해 10월 EU 집행위가 산업별·비(非) EU 기업 표준안 채택일을 2년 연기했습니다.
그 결과, 산업별·비EU 기업 표준안 제정은 오는 2026년으로 연기됩니다. 단, 비EU 기업의 CSRD 적용 시작일은 당초 예정대로 회계연도 2028년(FY2028)으로 유지됩니다.
“CSDDD·CSRD 공시기준 연기와 별개로 韓 기업 대비 절실” ⚖️
한편, CSDDD와 CSRD 공시기준 시행이 연기된 가운데 한국 기업들은 EU의 최종 승인과 무관하게 공급망 실사체계를 갖춰야 한단 제언이 나옵니다.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입장을 바꿔 법안엔 찬성을 하지 않는 한 법안을 지지하는 회원국들이 표결을 기피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한국 기업들의 대비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중소·중견기업 10곳 중 6곳은 공급망 실사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이동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제출받은 ‘글로벌 공급망 ESG 실사현황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59%는 공급망 실사를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별로 준비하고 있지 않다’와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응답은 각각 32.8%와 26.2%였습니다. ‘매우 잘 준비하고 있다’는 응답은 0.4%에 그쳤습니다.
조사는 10~300인 미만 국내 중소·중견기업 500개사를 대상으로 산자부가 한국생산성본부에 연구용역을 의뢰해 진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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