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World Bank)이 수십 년간 유지해온 원자력 에너지 금융 지원 금지 정책을 공식적으로 해제했다. 아자이 방가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12일(현지시간)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협력해 원자력 에너지 분야에 다시 참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번 결정은 기후 위기와 AI 기술 확산으로 인한 전력 수요 폭증에 대응하고, 개발도상국의 저탄소 에너지 전환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적 전환이다.
66년 만의 전환…세계은행, 원전 투자 재개
세계은행은 이번 정책 변화에 따라 기존 원자로의 수명 연장, 전력망 현대화, 관련 인프라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이와 함께,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의 활용 가능성을 높여 더 많은 국가에서 현실적인 에너지 대안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할 계획이다.
세계은행이 마지막으로 원자력 프로젝트를 지원한 사례는 1959년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2013년부터는 공식적으로 금융 지원을 중단했으며, 그 배경에는 독일 등 주요 기부국의 반대와 핵 확산에 대한 일부 국가들의 우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 정책 전환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친원자력 기조와 더불어 독일 정부의 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이끄는 독일 새 정부는 국내 정치적 반대 여론에 따라 유지해온 반(反)원자력 입장을 철회했다. 지난 5월에는 프랑스가 추진하는 원자력 에너지의 재생에너지 동등 대우 방침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방가 총재는 개발도상국의 전력 수요가 2035년까지 두 배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충족하려면 발전, 전력망, 저장 분야에 대한 연간 투자가 기존 2,800억 달러(약 385조 원)에서 6,300억 달러(약 867조 원)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간 부문의 참여가 핵심이라며, 세계은행은 보증과 지분투자 등 다양한 금융 수단을 통해 이를 적극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세계은행은 태양광, 풍력, 지열, 수력, 천연가스 발전소 등 다양한 에너지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입할 계획이다. 단, 천연가스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저해하지 않는 조건에서만 지원된다. 방가 총재는 여전히 상류 가스 개발에 대한 지원 여부는 이사회 내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향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다자간 대출 기관인 세계은행의 이번 결정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침체되었던 글로벌 원자력 산업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기후 변화와 전력 집약적인 AI 기술의 확산은 각국 정부로 하여금 원자력 에너지의 역할을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는 태양광, 풍력처럼 간헐적인 재생에너지와 함께 작동할 수 있는 무탄소 전력의 안정적 기반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1986년 체르노빌, 1979년 스리마일섬, 2011년 후쿠시마 등 과거의 대형 사고는 방사능 유출에 대한 우려를 여전히 남기고 있다.
2023년 두바이에서 열린 COP28 기후 정상회의에서는 30개국 이상이 파리협정의 목표 달성을 위해 2050년까지 전 세계 원자력 발전 용량을 세 배로 확대하겠다는 공동 서약에 서명했다.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 역시 지난 4월 세계은행에 금지 조치 해제를 촉구하며, “많은 신흥 시장의 에너지 공급을 혁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정책 변화는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다른 다자간 개발 금융 기관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정부 보증을 바탕으로 한 금융은 건설 지연과 예산 초과 위험이 큰 대형 원자력 발전소 프로젝트에 있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그 외 친원자력 성향의 서방 국가들은 세계은행의 정책 전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이번 정책 변화는 개발도상국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활발히 건설 중인 러시아와 중국의 국영 기업들과의 경쟁력 확보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현재 러시아의 로사톰은 터키, 방글라데시, 중국, 인도, 이란 등 여러 국가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 중이다.
아프리카 가나 등 개발도상국도 에너지 인프라의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세계은행의 원자력 발전 자금지원 정책 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가나 에너지부 기술 고문 이슈마엘 아카는 “우리는 24시간 가동되는 경제를 원하며, 산업 생산이 밤낮 없이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