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의회 하원과 상원 모두 유럽인권재판소(ECHR)의 기후소송 판결을 무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최종 판단은 스위스 정부에 달려 있습니다.
18일 그리니엄이 스위스 의회 홈페이지를 확인한 결과, 하원은 유럽인권재판소의 권고를 거부하는 선언문을 지난 12일(이하 현지시각) 공식 채택했습니다. 해당 선언문은 하원에서 찬성 111표·반대 72표·기권 10표로 가결됐습니다.
앞서 지난 5일 스위스 상원 역시 찬성 31표 대 반대 11표로 유럽인권재판소의 권고를 거부하는 결의안을 공식 채택했습니다.
스위스가 기후대응 노력을 최대한 하고 있을뿐더러,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에 대해 추가 조치를 할 이유가 없단 것이 스위스 의회의 주장입니다.
유럽인권재판소 기후소송 판결에 스위스 의회 “사법부 판단 영역 아냐” ⚖️
앞서 지난 4월 유럽인권재판소는 스위스 정부가 기후대응 노력을 소홀히 해 고령자들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해당 소송은 스위스 환경단체 ‘기후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클럽’들이 제기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당시 판결에서 “스위스가 기후위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은 인권침해”란 원고 측의 주장을 수용했습니다.
기후소송과 관련해 국제 법원에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온 것은 해당 사례가 처음입니다. 해당 판결 결과는 항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의회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일부 의원들은 유럽 법원이 권력 분립이란 민주주의의 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기후대응은 사법부의 영역이 아니란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우파성향의 스위스국민당 소속 바바라 스타이네만 하원의원은 투표 직후 엑스(구 트위터)에 “스위스 의회 의원들은 외국 판사들에 의해 엑스트라로 축소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녹색당 등 좌파 성향의 의원들은 의회의 결정이 부끄럽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의회에서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을 두고 의원들 간 설파가 오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위스 의회의 이같은 결정은 의회 내 제1당인 스위스국민당이 주도했습니다. 스위스국민당은 현재 스위스 하원 전체 200석 중 62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BBC·폴리티코 “스위스 시민들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달가워 하지 않아” 🤔
스위스 시민들 역시 유럽인권재판소의 기후소송 판결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BBC·폴리티코 등 주요 외신은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스위스 대다수 유권자는 자국 정부가 이미 환경 보호에 충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습니다.
이는 스위스가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스위스는 1년에 평균 4차례 국민 직접 투표를 통해 정책 법안을 제정합니다. 작년 6월 국민 직접 투표 결과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한 기후법이 통과됐습니다.
해당 법안은 2050 탄소중립을 위해 단계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세우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더 끌어올리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BBC는 “스위스인들은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국민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일에 익숙하다”고 분석했습니다.
“최종 판단은 정부에게”…유럽인권재판소 판결 이행 거부한 사례 없어 🏛️
이제 공은 행정부로 넘어갔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의회가 각각 채택한 선언문과 결의안을 유럽평의회에 제출해야 합니다. 아니면 의회 결정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행정부 내부에서도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스위스 정부를 이끄는 연방평의회 소속인 알베르트 뢰스티 스위스 환경부 장관은 정부가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을 따를 필요성이 없단 점을 앞서 내비친 바 있습니다. 그 역시 스위스국민당 소속입니다.
비트 얀스 스위스 법무부 장관은 의회의 이같은 결정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비올라 암헤르트 스위스 대통령은 아직 별도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스위스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이목이 몰립니다.
유럽평의회에 가입된 회원국 중 어느 곳도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 이행을 거부한 사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럽평의회는 1949년 민주주의 증진과 인권·법치주의 보호를 목표로 설립된 유럽 인권 기구입니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을 포함해 총 46개국이 가입돼 있습니다.
유럽평의회 모든 회원국은 유럽인권협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고, 협약 위반 시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될 수 있습니다.
유럽평의회 “스위스 기후소송 다시 재판소 회부 가능성도” 😲
지난 4월 판결 당시 유럽인권재판소는 스위스 정부가 6개월 이내에 유럽평의회 장관 위원회에 구체적인 기후대응 계획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스위스 정부가 의회 판단을 수용해 재판소에 계획을 제출하지 않을 시 유럽인권재판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유럽평의회도 이례적으로 스위스 의회의 행보에 입장을 밝혔습니다. 앤드루 커팅 유럽평의회 대변인은 현재까지 어떤 회원국도 판결을 이행하지 않은 적이 없단 점을 강조했습니다.
또 극히 예외적으로 유렵평의회 장관 위원회가 사건을 재판소로 다시 회부할 수 있단 점도 언급했습니다. 이는 유럽평의회 설립 후 65년간 단 2차례만 일어났습니다.
이 가운데 스위스국민당은 스위스가 유럽평의회를 탈퇴해야 한단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인포 등 주요 현지매체는 스위스 정부가 늦어도 8월까지는 결정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영국 등 유럽 인근 국가들은 스위스 정부의 판단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기후환경단체·인권단체 스위스 의회 결정 비난 🗣️
한편, 유럽인권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원고 측과 주요 기후환경단체 모두 스위스 의회의 이같은 결정에 즉각 반발했습니다.
기후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클럽은 스위스 정부가 재판소 판결에 불복할 가능성에 대비해 유럽평의회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정부 압박 강도를 높인다는 방침입니다.
단체 선임 변호사를 맡은 코델리아 배어는 “스위스 정부가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불충분한 기후행동을 지속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스위스는 물론 세계 기후대응 움직임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영국 런던정경대의 이사벨라 코이슈니그 법률연구원은 스위스 정부가 재판소 판결 불이행 시 “민주주의 체계에서 사법부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우려스러운 선례가 남을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국제법률가위원회(ICJ)와 국제앰네스티 등 주요 인권단체 역시 스위스 의회의 결정을 비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