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벌의 날’입니다. 그 이틀 뒤인 5월 22일은 ‘세계 생물다양성의 날’로 기념합니다.
두 기념일 모두 생물다양성 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날입니다.
특히, 생물다양성에서 벌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습니다. 벌은 생태계의 주요 수분 매개자이기 때문입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벌과 나비 등 수분 매개자는 세계 작물의 35%의 수분을 담당합니다. 주요 식량 작물 115종 중 87종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벌을 비롯한 주요 수분 매개자는 인간의 영향으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밀원지 파괴와 단일경작, 살충제 사용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
최근에는 월동 과정 중 꿀벌들이 집단으로 사라지는 꿀벌 실종이 계속되며 위험성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벌을 살리되, 같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2005년 영국 잉글랜드 콘월에 설립된 ‘그린&블루 디자인 스튜디오(이하 스튜디오)’의 아이디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유명 전자제품 기업 다이슨의 디자이너 출신 게빈 크리스트먼이 공동설립했습니다. 다이슨은 혁신적인 디자인 제품을 설계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크리스트먼 대표의 아이디어는 단순합니다. 바로 도시에 벌이 살 수 있는 서식지를 마련해주자는 것.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꿀벌 벽돌’입니다.
정면에 구멍이 뚫려 있어 벌이 둥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벽돌과 같은 크기로, 벽의 일부를 대체하는 방식입니다. 점토로 구멍 입구가 막히면 벌이 둥지를 틀었단 뜻입니다.
벽돌은 콘웰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콘크리트를 재활용해 제작됐습니다.
물론 집과 사무실 근처에 벌이 날아다닌다는 생각에 걱정이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크리스트먼은 “걱정할 필요가 적다”고 말합니다. 이 벽돌이 기존에 생각하는 ‘꿀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크리스트먼은 벌 중에서도 ‘고독한 벌(Solitary Bee)’에 주목합니다.
고독한 벌이란 군집을 짓지 않고 홀로 생활하는 종을 말합니다. 단독성 벌, 독거벌 등으로도 불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이라고 하면 양봉벌과 호박벌을 떠올립니다. 허나, 영국의 경우 이보다 더 다양한 벌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 90% 이상이 군집을 짓지도 꿀을 생산하지도 않는 고독한 벌에 속합니다.
이들은 일반 꿀벌과 달리 벌집이 아닌 둥지를 틀고 서식합니다. 무리 짓지 않기 때문에 공격성이 낮습니다.
고독한 벌들은 도시에서 둥지를 틀 수 있는 장소와 재료가 제한된단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꿀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꿀벌에 비해 덜 인식되고 덜 보호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사람이 주거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에서 벌과의 공존을 모색하자는 것이 크리스트먼의 제안입니다.
2020년에는 당시 왕세자였던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자신의 영지 내 주택 개발 단지에 이 꿀벌 벽돌을 사용하며 화제가 됐습니다.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50여년 간 기후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해온 인물입니다.
이후 크리스트먼은 생태학자와 협력해 꿀벌 벽돌을 여러 형태로 확장했습니다.
도시 경관이나 정원 조경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형 기둥 모양부터 어느 공간에든 끼워 넣을 수 있는 단독형까지 다양합니다. 예컨데 화분 일체형은 둥지 근처에서 바로 먹이를 찾을 수 있도록 고안됐습니다.
물론 이러한 둥지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벌의 생존이 불충분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고독한 벌들은 둥지 100m 이내에서만 먹이를 찾기 때문입니다. 이에 둥지 근처에 밀원 식물을 마련해주는 것이 병행돼야 한단 것.
또 벌의 습성을 고려해 지면에서 최소 1m 높이에 꿀벌 벽돌을 배치해야 한다고 크리스트먼은 설명했습니다. 가능한 많은 직사광선이 비출수록 좋습니다.
페이 클리프턴 스튜디오 영업이사는 “우리는 꿀벌 벽돌이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생물다양성과 자연을 염두에 둔 건축 방식의 일부”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밖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고독한 벌을 위한 서식지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독일 출신의 전(前) 포뮬러 1 챔피언인 제바스티안 페텔 선수가 아이들과 함께 고독한 벌을 위한 ‘꿀벌 호텔’을 만들었습니다. 자동차 경주 사이의 공백 기간을 더 좋은 일에 활용하고 싶었다는데요.
디자인은 오스트리아 스티리아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제안한 설계가 선정됐습니다. 그 결과, 경주용 자동차 모양의 꿀벌 호텔이 탄생했습니다.
2023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류 기업 인베로슈는 고독한 벌을 위한 호텔 포장재를 선보였습니다. 목재로 만들어진 포장재에는 벌들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남아공에 서식하는 1,200종의 고독한 벌을 위해 설계됐다고 사측은 밝혔습니다.
기획을 맡은 광고대행사 그리드월드와이드의 카일 슈만 크리에이티브디렉터는 “회사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직원(벌)들에게 보답하기를 희망했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