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가 ‘탄소상쇄’를 둘러싸고 내홍에 빠졌습니다.
SBTi의 탄소상쇄 인정 결정이 자발적 탄소시장(VCM) 전반에도 영향을 줄 것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2015년 출범한 SBTi는 기업들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에 대해 과학적 방법에 따른 측정과 계획실행을 요구하는 이니셔티브입니다. 기업들의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기준 충족 여부와 진행 상황 보고 등을 평가해 승인합니다.
탄소공개프로젝트(CDP), 유엔 글로벌콤팩트(UNGC), 세계자연기금(WWF) 등이 결성한 협의체입니다.
22일 그리니엄이 SBTi 홈페이지를 확인한 결과, 전 세계 8,386개 기업이 SBTi에 가입돼 있습니다. 이중 한국 기업은 70곳입니다.
SBTi로부터 인증받고 싶은 기업은 스코프 1·2·3 모두에서 배출량을 줄이는 ▲단기 감축목표(5~10년) ▲장기 감축목표(2050년)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에 SBTi로부터 목표를 인증받은 실제 기업 수는 5,231개입니다. 한국 기업은 34곳이 승인받았습니다.
스코프3 감축에 ‘탄소상쇄’ 인정…내부 직원 중심으로 반발 목소리 ↑ 🚨
문제는 ‘스코프3’ 에서 비롯됐습니다. 스코프3는 기업의 제품 생산 이외 유통이나 제품 사용, 폐기에 이르는 전체 공급망에서 발생한 탄소배출량을 뜻합니다.
스코프3는 배출량을 추적하고 계산하기 어려울뿐더러, 감축 역시 어려운 영역으로 여겨집니다.
그간 SBTi는 기업의 감축목표에 탄소상쇄 크레딧을 포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탄소상쇄가 포함될 경우 감축목표와 진행 상황 등을 추적하고 계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지난 9일(이하 현지시각) SBTi는 스코프3에서 환경속성인증서(EAC) 등 탄소크레딧을 이용한 탄소상쇄 역시 감축으로 인정하겠단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SBTi는 탄소상쇄 허용 이유에 대해 “온실가스를 확실하게 줄이는 동시에 (탄소크레딧이란) 보상을 통해 밸류체인 내 탈탄소화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탄소상쇄는 기업·기관이 삼림 조성이나 탄소크레딧 구매 등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배출량을 다른 곳에서 ‘상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업들은 대개 자발적 탄소시장에서 크레딧을 구매합니다.
그러나 성명 발표 직후 SBTi 내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사회 결정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진 상태입니다.
직원들은 자문위원회 위원 및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SBTi 최고경영자(CEO)와 이사진의 즉각적인 사퇴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는 등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SBTi 직원들이 감축목표서 ‘탄소상쇄’ 활용에 반대한 3가지 이유는?” 🤔
직원들이 반발한 이유는 크게 3가지입니다.
먼저 탄소상쇄를 감축목표에 허용할 시 기업들이 이를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으로 이용할 수 있단 것입니다. 기업들이 직접적인 감축 노력 없이 배출권을 구매함으로써 상쇄에만 매몰될 수 있단 주장입니다.
SBTi 자문위 역시 “정책 개정 시 기업들이 이를 그린워싱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며 개정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탄소 카우보이(Carbon Cowboy)’를 되레 장려할 수 있단 우려입니다.
열대우림이 풍부한 아프리카나 남미 국가 현지인들로부터 땅을 헐값에 구매하거나, 동의서를 강요하는 식으로 탄소상쇄 크레딧을 쓸어 담는 이들을 말합니다. 국내에서는 ‘탄소사냥꾼’으로 불립니다.
즉, SBTi가 탄소상쇄를 허용할 시 탄소 카우보이가 세계적으로 늘어날 수 있단 뜻입니다. 이 경우 SBTi가 그간 쌓은 신뢰와 명성에 손상이 갈 수 있단 것이 이들의 설명입니다.
마지막은 이번 발표가 SBTi의 운영체계, 즉 거버넌스 체계를 약화했단 주장입니다.
이번 발표는 환경속성인증서 등을 검토하고 승인하는 업무를 맡은 독립기관 SBTi 기술위원회와 상의하지 않고 발표됐습니다.
지난해 말 열린 SBTi의 마지막 기술위 회의에서도 기업에게 탄소상쇄를 감축실적으로 인정해 주자는 안건은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직원들은 성명을 통해 “SBTi 이사회가 독립적인 기술위의 지침을 따르지 않고 일방적으로 (탄소상쇄 도입을) 결정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SBTi는 평판을 위협하는 결정을 즉각 철회하고 루이스 페르난도 아마랄 CEO와 이사진의 사퇴를 촉구한다”고 밝혔습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의하면, SBTi 목표인증팀과 목표관리팀 나아가 기술부, 대외협력부, IT(정보기술)부 등 조직 내 거의 모든 부서가 이사회 해임을 건의한 상태입니다.
SBTi 이사회 “탄소상쇄 등 규칙 변경, 내부 논의 및 협의 거칠 것” ⚖️
SBTi 이사회와 아마랄 CEO는 직원들의 사퇴 촉구 서한에 대해 별도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이사회는 6개월간 이 주제에 대해 광범위한 의견 수렴을 진행했단 사실도 덧붙였습니다.
논란 사흘뒤인 12일 이사회는 성명을 통해 “탄소상쇄 인정이 SBTi 내 표준 변경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규칙 변경을 모든 구성원의 협의와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아마랄 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전체 공지를 통해 탄소상쇄 인정을 둘러싼 규칙 초안은 이르면 7월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지난 19일 이사회는 다시 성명을 내놓습니다. 이날 이사회는 성명에서 “(탄소상쇄 인정은) 배출량 감축에서 (기업들이) 추가로 수행할 수 있는 전략을 탐색하는 방향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 논의가 민감한 영역임을 인정한다”며 “규칙 개정과 관련해서는 모든 이해관계자들과 협의를 이어갈 것이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22일 아마랄 CEO는 본인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SBTi의 표준은 변경되지 않았다”며 “과학 및 공개협의를 통해 (탄소상쇄 인정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논란을 일축했습니다.
이 가운데 SBTi의 이런 결정 배경에 ‘베이조스 지구 기금(BEF)’의 압력이 작용했을 수도 있단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BEF는 SBTi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내부 직원은 “SBTi가 현재 자금난에 직면했다”고 전했습니다.
BEF는 미국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가 세운 기금입니다. BEF는 자발적 탄소시장 확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자발적 탄소거래 플랫폼 ‘에너지 트랜지션 액셀러레이터(ETA)’를 후원 중입니다.
SBTi의 성명 직후 BEF는 해당 결정에 지지한단 의사를 밝혔습니다. FT는 지난 3월 영국 런던에서 BEF와 SBTi 이사회가 회의를 진행했단 사실을 전하며, BEF가 이사회에 이번 결정을 내리도록 압력을 넣었을 수 있단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BEF는 “SBTi 결정에 미친 영향이 없다”고 의혹을 일축했습니다.
SBTi가 자발적 탄소시장에 던진 ‘논란’…“탄소상쇄, 둘러싸고 입장 엇갈려” ☁️
결론을 말한다면, SBTi의 감축실적 내 탄소상쇄 도입 여부는 미정입니다. SBTi 이사회에서는 계속 추진한단 반면, 내부 직원들은 이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SBTi의 성명은 자발적 탄소시장 전 영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단 것입니다.
탄소중립 가속화를 목표로 기업들이 연합한 위민비즈니스연합(WMBC)의 마리아 맨디루스 CEO는 탄소상쇄에 지지하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맨디루스 CEO는 “기업들이 SBTi를 중요하게 여기고 배출 감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스코프3 탐색 및 감축을 위해선 명확성과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자발적탄소시장이니셔티브(VCMI) 또한 성명을 통해 “탄소크레딧과 기타 시장 기반 메커니즘이 기업의 스코프3 배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며 “SBTi가 이를 인식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전했습니다.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의 요한 룩스트롬 소장은 더가디언에 “현 상황에서는 스코프1(직접 배출)과 스코프2(간접배출)과 달리 스코프3에 한해 상쇄를 인정해주는 방안이 가장 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동조했습니다.
물론 탄소상쇄 크레딧의 신뢰성과 투명성이 보장돼야 할뿐더러, 화석연료 단계적 폐지 등 실제 감축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룩스트롬 소장은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최근 엑스(구 트위터) 등 354개 기업이 기한 내 감축목표 세부계획을 제출하지 못해 SBTi에서 퇴출된 상태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유니레버 등 몇몇 다국적 기업은 SBTi에 장기 감축목표 선언을 철회했습니다.
반면, 독일 비영리단체 신기후연구소(NCI)와 카본마켓워치(CMW) 등은 SBTi 이사회의 결정은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일관성이 없을뿐더러, 과학에 기반하지 않았단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CMW는 성명에서 기업들의 감축실적에 탄소상쇄를 인정할 시 “실제로는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SBTi 공동설립에 참여한 WWF 역시 우려를 내비쳤습니다. WWF는 성명을 통해 “탄소상쇄는 기업들의 밸류체인 내에서 배출량을 줄이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고 우려했습니다.
한편, 시장조사기관 블룸버그NEF(BNEF)는 SBTi가 탄소감축 범위에 탄소상쇄를 인정할 시 탄소크레딧 수요를 촉진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 경우 2050년 연간 탄소크레딧 수요가 1조 1,000억 달러(약 1,520조원)까지 치솟으로 것으로 BNEF는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