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기후와 환경 변화에 대한 인류의 영향을 인정하는 ‘인류세’ 지정이 부결됐습니다.
국제지질과학연맹(IUGS) 산하 ‘제4기 층서 소위원회’에서 진행된 인류세 인정 투표 결과, 과반수의 반대로 해당 안건은 부결됐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이 지난 5일(이하 현지시각) 전했습니다.
‘인류세(Anthropocene)’란 그리스어로 ‘인류(anthropos)’와 ‘시대(cene)’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을 바꾼 시기를 이르는 새 지질시대의 명칭입니다.
지질학적으로 홀로세(현세) 중에서도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 이후를 새로운 시대(세)로 설정해야 한다는 제안에서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쉽게 말해, 인류가 마치 소행성 충돌이나 공룡처럼 지구의 지층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투표는 인류세를 공식 인정하기 위한 최종 절차 중 하나였습니다.
투표 결과에 대해 인류세 프로젝트를 주도해 온 인류세실무그룹(AWG)의 콜린 워터스 의장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라고 토로했습니다.
급부상한 ‘인류세’ 논의…“인간 활동, 지구 지층까지 흔적 남겼다” 🌏
인류세 논의를 처음 꺼낸 인물은 네덜란드 기상학자이자 대기화학자인 고(故) 파울 크뤼천 박사입니다. 대기 오존층을 파괴하는 원인을 발견한 공로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인물입니다.
인류의 과도한 산업화와 온실가스 배출 등으로 지구환경이 새로운 지질시대에 들어섰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이에 새로운 지질시대, 즉 인류세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후 IUGS는 2009년 AWG를 설립하며 인류세 지정 연구에 본격 돌입합니다.
AWG는 여러 논의와 조사 끝에 인류세를 대표하는 지표 물질로 인류의 핵실험 결과물인 플루토늄을 선정했습니다. 인류세 시작 시점 또한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일어난 1952년을 제안했습니다.
특히, 작년 7월 AWG는 인류세를 대표할 지역으로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크로포드 호수’를 선정했습니다.
AWG는 크로포드 호수의 진흙층 속 퇴적층이 인류세의 화학적 시작점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핵폭발로 날아온 플루토늄, 화석연료가 타면서 나온 재가 호수 퇴적층에 남았단 것입니다.
GSSP 선정은 인류세 지정을 위한 마지막 과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인류세 지정을 계기로 대중에게 전 지구적 행동의 필요성을 촉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국제지질과학연맹 소위원회 투표 결과, 66% 인류세 지정 반대 🤔
인류세는 이번 소위원회 투표에서 통과되면 국제층서위원회(ICS) 투표를 거쳐 오는 8월 부산에서 열릴 제37차 세계지질과학총회(IGC)에서 최종 비준될 예정이었습니다. 인류세가 인정받기 위해선 각 투표에서 60%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공표를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인류는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포드절’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20여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6주간 인류세 도입에 대한 투표를 진행한 결과, 반대표 66%로 부결됐습니다. 의결 정족수는 찬성 4명·반대 12명·기권 2명으로 전해졌습니다. 3명의 위원은 투표도 기권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워터스 의장은 해당 투표가 확정될 경우 인류세 인정은 중단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투표 결과와 별개로 인류세에 대한 증거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이에 워터스 의장은 “향후 제안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요청”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투표 절차와 결과에 대한 문제제기도 나왔습니다.
주요 외신 보도 직후 이튿날(6일) 얀 잘라시에비츠 소위원회 위원장은 “해당 투표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국제층서위원회(ICS)의 법령을 위반해 수행됐다”며 투표를 무효로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인류세 지정 부결…“단, 인류 영향 부정한 건 아냐” 🙅
과학저널 네이처와 사이언스 또한 인류세 지정 부결을 비중있게 다뤘습니다. 전문가들이 인류세 담긴 함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다만, 지질학 용어를 정의하는 절차적 관점에서 숙고가 필요하단 것이 이번 투표의 결과입니다. 1952년을 기준으로 새로운 연대를 지정하기에는 7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단 것.
즉, 인류세 도입이 아직 성급하단 지적입니다.
필립 기바드 영국 케임브리지대 지리학 교수는 인류세를 공식적인 시대(세)가 아니라 지질학적 ‘사건(event)’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번에 투표에 참여한 소위원회 위원 중 한 명입니다.
지질학계에서 사건은 공식 지질 연대표에 표기되지 않으며, 위원회 승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페름기-트라이아스기 멸종이 대표 사례입니다.
기바드 교수는 인류세를 시대로 정의할 경우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며 ‘사건’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위원회 위원인 킴 코헨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 자연지리학 교수 또한 “인류세라는 개념은 계속해서 유용하고, 또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코헨 교수는 인류세란 개념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정치 전반에 걸쳐 여전히 많이 사용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얼 앨리스 미국 메릴랜드대 지리·환경시스템학과 교수는 “인류세 지정에 소위원회 위원 대다수가 ‘반대’에 투표함으로써 실제로 더 강력한 성명을 내놓은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AWG 소속인 앨리스 교수는 네이처에 “(투표 결과는) 인류세에 대한 더 넒은 관점, 즉 깊은 관점을 고려하는 것이 더 유용하단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습니다.
사이언스는 “소위원회가 인간의 영향을 반영한 새로운 지질시대는 거부했지만 ‘인류세’란 개념 자체는 유지됐다”고 전했습니다.
한편, 국내 지질학계에서도 인류세 도입 무산에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오는 8월 부산에서 열리는 37차 IGC 총회에서 세계 최초로 인류세를 공표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표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