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지구의 기후와 환경 변화에 지배적 영향을 끼쳤다는 지질학계의 공식 선언이 발표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1일(현지시각) 국제층서위원회(ICS) 산하 인류세워킹그룹(AWG)은 투표를 통해 캐나다 온타리오주 크로포드 호수를 인류세를 대표하는 지층인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이하 표준층서)’로 선정했습니다.

‘인류세(Anthropocene)’란 그리스어로 ‘인류(anthropos)’와 ‘시대(cene)’의 합성어입니다. 지질학적으로 홀로세(현세) 중에서도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 이후를 새로운 시대(세)로 설정해야 한다는 제안에서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이에 국제지질과학연맹(IUGS) 산하 기구로 공식적인 지질시대 명명 권한을 부여받은 ICS가 AWG를 구성해 해당 논의를 이끌어 왔습니다.

표준층서 선정은 인류세를 공식적인 지질시대로 인정하는 과정의 마지막 과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인류세 개념을 대중화한 인물은 네덜란드의 기상학자이자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으로, 오존층 파괴의 원인을 밝혀낸 공로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Carsten Costard, MPI for chemistry

노벨화학 수상자의 선언 “우리는 이미 인류세를 살고 있다” 📜

인류세 논의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네덜란드 기상학자이자 대기화학자인 고(故) 파울 크뤼천 박사가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지구권-생물권 프로그램(IGBP) 회의에서 인류세를 언급하면서부터였습니다.

크뤼천 박사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원인을 발견한 공로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인물입니다.

크뤼천 박사는 IGBP 회의에서 “우리는 이미 인류세에 있다”고 선언하며 인류세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인류의 과도한 산업화와 핵 개발, 광석 채굴, 온실가스 배출 등으로 인해 지구환경이 새로운 지질시대에 들어섰단 것. 이를 인류세로 명명하자고 한 것입니다.

 

▲ 지질시대는 ‘자연에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지질학적 흔적을 남겼는가’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National Gallery of Canada

AWG “급속한 산업화가 시작된 1950년대 ‘인류세’ 시작점” 🗺️

지질시대는 누대(累代), 대(代), 기(紀), 세(世), 절(節)로 구분됩니다. 현재 인류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 메갈라야절’에 살고 있습니다.

지질시대의 구분은 ‘자연에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지질학적 흔적을 남겼는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이 때문에 크뤼천 박사의 제안은 지질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빙하기처럼 인류의 활동이 지질시대를 구분할 만큼 뚜렷한 지질학적 흔적을 남겼는지입니다. 일부 지질학자들은 인간의 환경파괴를 강조하는 정치적 목적이란 지적과 함께 새로운 세(cene)를 판별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라 반발했습니다.

이에 국제층서위원회(ICS)는 2009년 10여개국 34명의 과학자로 이루어진 인류세워킹그룹(AWG)을 만들어 인류세의 인정 여부 연구를 시작합니다.

논의 초기인 2016년 AWG는 투표를 거쳐, 인류세를 새로운 ‘세’로 볼지 홀로세를 유지한 채 새로운 ‘절’로 볼지 논의했습니다. 학자들은 투표를 통해 ‘세’로 결정했습니다. 최근의 지질 변화의 정도가 그만큼 크다는 점에 학자들이 동의한 셈입니다.

2019년 투표에서는 급속한 산업화가 시작된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AWG는 1950년대 핵폭발과 비료 그리고 발전소에서 나온 물질들이 지구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홀로세: 마지막 빙하기 이후 현재까지 1만 1,700년 간 이어오고 있다.

 

▲ 국제층서위원회( 산하 인류세워킹그룹이 캐나다의 크로포드 호수에서 퇴적층을 채굴하는 모습. ©캐나다 자연사박물관

AWG, 9곳 후보 중 ‘인류세’ 대표 지층으로 캐나다 크로포드 호수 선정 🌊

그간 AWG는 인류세를 대표하는 지표물질로 ▲플루토늄 ▲플라스틱 ▲순수 알루미늄 등을 고려해왔습니다.

플루토늄은 인류의 핵실험으로 인한 영향을 방증하고, 플라스틱과 순수 알루미늄은 산업 발전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2022년 AWG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입증하는 표준층서의 후보를 선정했습니다.

인류세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표본지 후보로는 ①캐나다 온타리오주 크로포드 호수 진흙층 ②일본 규슈섬 벳푸만 해양 퇴적물 ③호주 플린더스 산호해 산호 ④발트해 고틀란드 분지 해양 퇴적물 ⑤남극 팔머 빙핵 얼음 ⑥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빌호 퇴적층 ⑦중국 지린성 쓰하이룽완 호수 진흙 ⑧폴란드 수테테스산맥 늪지 토탄 ⑨멕시코만 웨스트 플라워가든 뱅크 산호 등입니다.

 

▲ 인류세를 대표하는 지층 조사를 위해 후보지로 선정된 9곳의 위치. 이중 캐나다 크로포드 호수가 선정됐다. ©greenium

그리고 지난 11일(현지시각) 회의에서 인류세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표본지로 크로포드 호수가 선정된 것. 크로포드 호수 면적은 2.4㏊(헥타르)로 큰 편은 아니나 깊이가 24m에 달합니다.

AWG는 크로포드 호수의 진흙층 속 퇴적층이 인류세의 화학적 시작점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AWG에 속한 앤드류 컨디 영국 사우샘프턴대 환경방사화학 학과장은 크로포드 호수 샘플에서 “1952년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과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플루토늄 급증이 잘 드러났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함께 구형탄소입자(SCP)**와 고농도의 중금속, 미세플라스틱 등 급격한 산업발전으로 인한 “인류의 대가속(Great Acceleration) 시기와 일치하는 증거”들이 다수 발견됐습니다.

**구형탄소입자(SCP): 석탄화력발전소·중공업 등에서 고온에서 화석연료를 연소할 때 발생하는 독특한 형태의 블랙카본의 일종. 화석연료 소비의 급증을 반영하는 지표로 사용된다.

 

▲ 크로포드 호수의 퇴적층 동결 코어를 시기별로 구분한 이미지. 붉은 점선이 인류세의 시작점인 1950년대의 퇴적층이 시작되는 부분을 나타낸다. ©Carleton University

인류세 시대의 의미는? “전 지구적 행동의 필요성 촉구” 🕯️

지질학계에서는 관행적으로 인류세의 첫 절의 이름을 표준층서의 이름에서 따옵니다.

즉, 인류세가 공식 지질시대로 인정되면 앞으로 인류는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포드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세 지정 여부는 올여름말 국제층서위원회(ICS) 산하 ‘제4기 층서학 소위원회’와 내년 봄 국제지질과학연맹(IUGS)에서 실시되는 투표로 결정됩니다. 두 투표 모두 회원들의 60% 이상이 찬성해야 합니다.

두 회의 직후 인류세를 공식화하기 위한 절차가 개시됩니다. 이후 인류세에 대한 최종 결정은 내년 8월 부산에서 개최될 세계지질과학총회에서 나올 전망입니다.

전문가들은 인류세의 공인이 전 지구적 행동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콜린 워터스 AWG 위원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1950년대에 시작된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에 일으킨 매우 급격한 변화를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이것이 인류의 영향이 좋은 방향으로도 빠르게 바뀔 수 있단 것을 나타낸다며 “희망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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