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농업 관련 기후·환경 정책을 잇달아 철회하며 농민 달래기에 나섰습니다. 생산비 증가, 환경규제 등으로 유럽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가 격화된 것에 따른 조치로 풀이됩니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이끌고 도로와 주요 거점시설을 점거하며 EU의 과도한 환경규제 정책의 폐지와 대책 마련을 촉구했습니다. 트랙터 시위는 지난 1월 독일과 프랑스를 시작으로 스페인·이탈리아·폴란드·루마니아 등으로 번졌습니다
그리니엄이 확인한 결과 14일 기준, 영국을 포함한 28개 유럽 국가 중 22개에서 트랙터 시위가 일어났거나 진행 중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지난 2년간 농민들의 부담이 증가한 가운데 EU에서 나온 ‘2040 기후목표’를 비롯한 정책 부담이 방아쇠를 당겼단 분석입니다.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를 두고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지자 EU 집행위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습니다.
동유럽에서 시작된 농민 시위, 독일·프랑스 등지로 확산 🚜
시작은 지난해 11월 폴란드의 트럭 시위였습니다.
폴란드 농민들이 값싼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항의하며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트럭으로 막아선 것입니다. 농민 시위는 폴란드를 넘어 헝가리·루마니아 등 인근 동유럽 국가로 퍼졌습니다.
동유럽의 농민 시위는 각국 정부의 대응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지만 그 여파는 주변 EU 국가로 향했습니다. EU 27개 회원국 중 덴마크·에스토니아·오스트리아·스웨덴·핀란드를 제외한 22개 국가에서 트랙터 시위가 일어났거나 진행 중입니다.
브렉시트로 EU를 탈퇴한 영국에서도 트랙터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주요 국가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독일|농업 보조금 삭감 항의
독일에선 농민들이 정부의 농업 보조금 삭감에 항의하며 트랙터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지난달 8일(이하 현지시각) 독일농민협회(DBV)는 농업용 디젤 보조금 삭감 조치에 항의하며 트랙터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베를린, 쾰른, 함부르크 등 독일 주요 도시에 트랙터와 트럭이 시내 중심부로도 진입했습니다.
🇫🇷 프랑스|살충제 규제 및 유류세 인상 항의
프랑스에서도 지난 1월 18일 농민들이 트랙터를 이끌고 파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봉쇄에 나섰습니다. 정부에 살충제 규제 폐지와 유류세 인상 취소 등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위를 주도한 프랑스전국농민연맹(FNSEA)은 “수도로 향하는 모든 주요 도로는 농민들이 차지할 것”이라며 “수도에 대한 무기한 포위 공격을 시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같은달 31일에는 트랙터 시위대가 유럽 최대의 농산물 시장인 파리 남부 렁지스 도매시장의 봉쇄를 시도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장갑차를 투입했고, 이 과정에서 91명이 무단 침입·교통 방해로 체포됐습니다.
🇪🇸 스페인|역대 최악의 3년 가뭄에 농업 비상사태
농업 강국 스페인의 농민들도 지난 6일을 기점으로 트랙터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EU의 강도 높은 농업 규제와 높은 생산비용, 낮은 농산물 가격으로 농업의 미래가 지속불가능하다고 항의했습니다.
스페인 농업계는 장기간의 가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입니다. 카탈루냐 지역의 경우 3년간 역대 최악의 가뭄을 겪으면서 지난 1일 비상사태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EU 그린딜에 농민 불만 고조 “하향식·징벌적 정책” 👎
유럽 각국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EU의 환경규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단 점은 공통됩니다.
농민들은 EU 및 각국의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이 과도해졌다고 말합니다. EU 최대 농업 단체 코파-코게카(COPA-COGECA)는 2019년 EU 집행위가 ‘그린딜 계획’의 농업 정책에서 하향식·징벌적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자연복원법(NRL)’입니다. ▲2030년까지 육지·해양 20% 보호 ▲2030년까지 살충제 사용 50% 감축 ▲2050년까지 90%의 자연환경 복원 등을 골자로 합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농경지의 약 4%를 휴경지로 남겨야 합니다. 농민들은 휴경지 의무화와 살충제 사용 중단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각국 정부가 배출량 감소를 위해 디젤 유류세를 인상한 점도 비용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지난 1일 유럽 각국의 1,300여대 트랙터 시위대가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EU 본부로 향한 것도 이러한 불만 때문입니다.
당시 브뤼셀에서는 EU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브뤼셀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유럽의회와 EU 집행위 건물에 계란과 돌을 던졌습니다.
환경규제·수입농산물 유입 등 여러 문제 ‘라자냐’처럼 층층이 쌓여 폭발 🍝
농민들의 어려움은 환경규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2022년 러시아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EU 농가에도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습니다.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농기계 연료와 비료, 운송 비용 모두 급증했습니다.
동시에 물가 급등을 막기 위해 정부와 유통업계의 노력은 농산물의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탯에 따르면, 2023년 연말 농민이 받는 농산물 가격은 2022년 연말 대비 평균 9%가량 하락했습니다.
여기에 전쟁 이후부터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무관세로 대량 유입되면서 EU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농가 보호를 위한 EU의 조치가 역내 곡물 생산국에 대한 역차별을 불러왔단 비판이 거셌습니다.
EU가 메르코수르(MERCOSUR)*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박차를 가한다는 소식도 농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살충제와 항생제 등이 자유로운 남미의 농산물과 환경규제를 받는 EU 농산물의 경쟁이 불공평하단 불만이 고조됐습니다.
이에 알렉산더 드 크루 벨기에 총리는 지난 2일 농민 대표와의 회담 직후, 현 상황이 다양한 문제가 층층이 쌓인 “라자냐”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메르코수르: 남미의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우루과이·베네수엘라 등으로 이뤄진 경제공동체. 남미공동체라고도 불린다.
긴급대책 내놓은 EU, 2040 기후목표서 농업 목표도 삭제 ⚖️
각지에서 농민 시위가 격화되자 각국 정부와 EU 집행위는 긴급대책과 정책 철회 등을 발표하며 농민 달래기에 나섰습니다.
우선 마르가리티스 스히나스 EU 부집행위원장은 1월 31일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대한 2가지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첫째, 회원국의 요청 하에 시장가격 왜곡 여부를 조사해 심각한 혼란이 발생할 경우 시정조치를 허용합니다. 둘째, 가금류·계란·설탕 등 민감 품목의 수입량이 기준치를 넘으면 자동으로 관세를 부과합니다.
자연복원법에 따른 최소 4%의 휴경지 의무화도 올 한해 한시적 면제를 추진합니다. 단 해당 조치는 EU 27개 회원국이 합의해야 확정됩니다.
이어 지난 6일 EU 집행위는 ‘2040 기후 목표’에서 농업 분야의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를 제외한다고 밝혔습니다. 당초 초안에는 2015년 대비 2040년까지 농업 분야 탄소배출량을 30% 감축한다는 내용이 포함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살충제 사용 50% 감축 의무화 법안도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이라고 EU 집행위는 덧붙였습니다.
붑커 훅스트라 EU 기후담당 집행위원은 이날 유럽의회 연설에서 ‘균형 잡힌 접근’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시민 대다수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길 원한다”면서도 “본인들의 생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크루 벨기에 총리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농민들을 계속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번 결정을 환영의 뜻을 표했습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유류세 인상 계획을 백지화와 수입산 농산물과의 공정한 경쟁을 위한 추가 조치 마련을 약속했습니다. 축산농가 지원을 위한 1억 5,000만 유로(약 2,150억원)의 재정 지원책도 발표됐습니다.
스페인 정부 또한 14만 명의 농민을 대상으로 2억 6,900만 유로(약 3,85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입니다.
다만, 작년 연방헌법재판소 판결로 재정 공백이 발생한 독일에선 농업 보조금 감축이 강행될 예정입니다.
<저작권자(©) 그리니엄,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