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태풍 피해자 103명이 영국 런던 고등법원에 석유기업 쉘(Shell)을 상대로 역사적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2021년 12월 필리핀을 강타한 슈퍼 태풍 라이로 인한 피해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 이번 소송은 석유기업의 기후변화 기여도와 개인 피해 간의 직접적 연관성을 주장하는 최초의 민사 소송 중 하나입니다.
시속 270킬로미터의 강풍을 동반한 태풍 라이는 405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고, 약 7억~10억 달러(약 1조 4,765억 원)의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혔습니다. 수십만 명이 단 하루 만에 집과 생계를 모두 잃었습니다.
“우리는 평생 열심히 일해서 집을 지었는데, 몇 시간 만에 사라졌어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대출을 받아야 했어요”라고 바타산 섬에서 생선을 판매하던 트릭시 엘레는 기자회견에서 절망감을 토로했습니다.
이번 소송은 쉘 본사가 위치한 영국에서 진행되며, 피해가 발생한 필리핀의 법률이 적용될 예정입니다. 원고 측은 쉘이 1965년부터 화석 연료 연소가 기후 변화의 주요 원인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과학적 합의를 약화시키는 조직적인 캠페인을 벌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쉘 온실가스 배출량 2% vs 필리핀 0.2%로 10배 차이 부각하며 귀인 과학 활용
원고 측은 ‘귀인 과학(Attribution Science)’이라는 첨단 방법론을 활용해 쉘의 역사적 화석연료 생산량을 기반으로 기후 변화에 대한 기여도를 정밀하게 추정하고, 태풍 피해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려는 전략을 펼칠 예정입니다. 이들은 쉘이 전 세계 화석연료 기반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2%를 차지하는 반면, 피해국인 필리핀은 고작 0.2%에 불과하다는 10배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고 측 법률팀은 쉘이 세계 최대 석유기업 중 하나이며, 기후 변화에 대한 사전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소송 대상으로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쉘은 기후 변화에 대한 독점적 지식을 보유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이 문제는 수십 년간 공개적 논의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었다고 강력히 반박했습니다. 또한 에너지가 가져다주는 이익과 정부, 기업, 소비자들이 수십 년간 내린 선택들이 현재의 에너지 시스템을 형성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쉘은 과거에도 기후 관련 소송에 여러 차례 연루된 바 있습니다. 2021년 네덜란드 법원으로부터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탄소 배출량을 45% 감축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2023년 항소심에서 이 명령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쉘이 대형 화석연료 생산자로서 배출 감축에 대한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명확히 언급했습니다.
쉘은 태풍 오데트 발생 직후인 2022년에 무려 423억 달러(약 62조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으며, 2023년에도 193억 달러(약 28조 원)의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이는 태풍 피해액의 최대 57배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이번 소송은 그린피스 필리핀, 법적 권리 및 천연자원 센터, 필리핀 기후 정의 운동, 영국 환경 단체 업리프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기후 소송 연구자 조이 레예스는 “법원들이 점차 기후 과학을 심도 있게 고려하고 기업과 그들의 책임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인정하는 추세”라고 분석했습니다.
독일에서는 페루 농부가 에너지 기업 RWE를 상대로 제기한 유사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판사는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에 대해 기업의 법적 책임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중요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소송이 성공할 경우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기후 책임이 근본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특히 기후 변화의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는 개발도상국 주민들이 선진국 기업들을 상대로 실질적인 배상을 요구하는 새로운 법적 경로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제법적 선례로 작용해 유사한 기후 소송의 급속한 확산을 촉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