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연료 프로젝트 승인 시, 프로젝트로 인한 간접 배출량까지 환경영향평가(EIA)에 고려해야 한다는 영국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번 판결은 영국 남부 개트윅공항 인근 유전개발 프로젝트를 둘러싼 문제 제기에서 시작됐습니다.
소송은 2019년 환경단체 윌드액션그룹(WAG)의 사라 핀치 활동가가 주도했습니다. 그는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환경영향평가에서 석유 제품으로 인한 배출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핀치 활동가는 프로젝트를 승인한 지역 의회를 상대로 승인 취소 소송을 진행해 왔습니다.
25일 그리니엄이 판결문을 확인한 결과, 영국 대법원 재판관 5명 중 3명은 핀치 활동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앞서 지역 의회와 영국 고등법원 그리고 항소법원 모두 그의 의견을 기각한 것과 대조됩니다. 판결에 따라, 프로젝트 승인은 파기됐습니다. 이번 판결은 지난 20일(이하 현지시각) 발표됐습니다.
향후 영국의 신규 화석연료 프로젝트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단 분석이 나옵니다.
기후활동가 “석유 프로젝트 승인, 제품 사용 배출량까지 고려돼야” 📣
이번 소송은 영국 개발기업 호스힐디벨롭먼트(이하 호스힐)가 신규 유전개발에 나서며 시작됐습니다. 호스힐은 영국 석유탐사업체인 영국석유가스투자(UKOG)가 프로젝트 개발을 위해 설립한 자회사입니다.
2019년 호스힐은 기존 유정을 확장하는 동시에 신규 유정 4개를 개발할 계획을 발표합니다. 일명 호스힐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가 시행될 경우, 20년간 약 330만 톤의 석유를 시추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이를 위해 사측은 절차에 따라 환경영향평가서를 서리카운티 의회에 제출합니다.
허나, 핀치 활동가를 포함한 WGA는 서리카운티 의회에 해당 평가의 범위 설정에 결함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핀치 활동가는 환경영향평가가 시추된 석유의 사용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번 프로젝트에서 채굴된 석유로 인한 탄소배출량이 1,000만 톤 이상에 해당할 것이라고 단체는 주장했습니다.
즉, 환경영향평가에 프로젝트의 다운스트림 배출량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단체는 이를 고려하면 호스힐 프로젝트가 영국의 기후변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점을 강조했습니다.
6년간 기각 거듭…英 대법, 항소심 뒤집고 의회 승인 취소 🇬🇧
반면, 호스힐 측은 환경영향평가 중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프로젝트 동안 유정 현장에서 직접 배출된 온실가스로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서리카운티 의회는 호스힐 측의 입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핀치 활동가는 고등법원과 항소법원에 연이어 제소했으나 모두 기각됩니다. 해당 소송은 대법원으로까지 갑니다.
그러던 지난 20일, 대법원으로부터 전향적인 판결이 나왔습니다. 소송 제기 후 무려 6년만의 일입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석유 사용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 “프로젝트의 효과”임이 “명백해 보인다”고 판시했습니다.
이어 “석유는 모두 연소된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그로 인해 온실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을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는 분석입니다.
대법원은 환경영향평가는 범위에 지리적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었습니다. “연소로 인한 탄소배출량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연소의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재판관의 지적입니다.
그 결과, 대법원은 호스힐 프로젝트에 대한 카운티 의회의 승인이 “불법적(unlawful)”이라고 판결했습니다.
英 대법 “모든 탄소집약 프로젝트에 다운스트림 적용 방침 아냐” 📢
단,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았습니다. 다운스트림 배출량은 화석연료 사업에만 고려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석연료만이 “필연적으로 연소돼 온실가스를 방출하기 때문”이란 것이 재판관의 지적입니다.
이와 비교되는 사례로 탄소집약적 원자재인 강철이 언급됐습니다. 이러한 원자재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재의 경우) 사용으로 인한 배출량을 평가·추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원의 말입니다.
대법원은 탄소집약적인 원자재에는 이번 판결을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향적 판결” 英 최대 미개발 유전 사업에 끼칠 영향은? ⚖️
이번 판결은 영국 내 화석연료 프로젝트 전반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분석됩니다.
핀치 활동가는 “엄청난 승리”라고 자평했습니다. 그는 이번 판결이 “새로운 화석연료 프로젝트가 기후 영향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며 “앞으로는 진행하기 훨씬 더 어려워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제환경단체 지구의 벗(FOEI) 또한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이 “화석연료 산업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일례로 영국 북부 컴브리아의 화이트헤이븐 탄광 또한 같은 문제 제기로 현재 소송 중입니다. 해당 소송은 호스힐 사업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하급법원에 계류 중이었습니다.
이번 판결이 당장 7월로 예정된 화이트헤이븐 탄광 관련 고등법원 청문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단 분석입니다.
영국 최대 미개발 유전인 ‘로즈뱅크 유전’ 개발 사업 또한 제동이 걸릴 수 있습니다. 영국 북해에 위치한 해당 유전은 석유 매장량이 무려 5억 배럴(약 800억 리터)로 추정됩니다.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 기업 에퀴노르와 이스라엘 이타카에너지가 공동 추진 중입니다. 2023년 영국 정부의 개발 승인 당시 야당인 노동당·녹색당 등으로부터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한편, 호스힐 프로젝트의 개발사인 영국석유가스투자는 해당 프로젝트의 규모를 축소한다는 계획입니다. 환경영향평가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 생산 규모인 일일 3,700배럴(약 58만 리터)까지 축소하겠단 것.
영국에서는 하루 시추량이 석유는 500톤 이상, 가스는 50만㎥ 이상일 경우 환경영향평가 제출이 의무화됩니다.
이와 관련해 스티븐 샌더슨 영국석유가스투자 최고경영자(CEO)는 AP통신에 “(법원의 판결이) 다소 당혹스럽다”고 밝혔습니다.
서리카운티 의회는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승인이) 적절한 시기에 결정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