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석유 기업들이 플라스틱 등 화학 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단 분석이 나옵니다.
에너지 분야에서 화석연료 소비를 감축할 시, 풍선효과로 플라스틱 소비가 증가할 수 있단 전망입니다.
지난 12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투자전문매체 배런스는 세계 플라스틱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며 이같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배런스는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자매지입니다.
배런스는 “100년간 수조 달러의 수익을 창출한 휘발유 시대가 정점을 지나 쇠퇴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석유 기업들이 다음 성장 동력으로 화학 산업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화학 기업 아람코를 비롯한 주요 석유 기업들은 최근 플라스틱 공장 건설과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해서는 화석연료 감축이 병행돼야 한단 제언이 나옵니다.
오는 23일부터 29일까지 캐나다 오타와에서 플라스틱 국제협약 마련을 위한 ‘제4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4)’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저물어 가는 석유 시대” 석유 기업의 ‘플랜 B’는 플라스틱? 🥤
2030년,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화석연료 수요가 정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 해입니다. 이는 재생에너지 공급 증가와 전기자동차·히트펌프 전환 등 전기화 덕분으로 분석됩니다.
동시에 IEA는 운송 부문에서의 석유 사용이 감소하는 대신, 석유화학 수요 증가가 업계를 뒷받침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IEA는 보고서에서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석유화학 수요가 급증하며, 선진국에서의 부진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주요 석유 기업은 화학 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아람코가 2022년 발표한 ‘원유에서 화학물질로(C2C·Crude oil to chemicals)’ 전략이 대표적입니다. 원유를 고부가가치 석유화학 제품으로 직접 전환하는 ‘원유화학물질 기술(TC2C)’이 핵심입니다.
아람코 자회사이자 세계 최대 석유화학 기업인 사빅(SABIC)과 협력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사우디 동부 주바일에서 110억 달러 규모(약 15조 2,000억원)의 석유화학단지 ‘아미랄 프로젝트’에 착공했습니다.
아람코는 이를 통해 2030년까지 하루 400만 배럴의 원유 등을 화학제품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입니다. 현재 100만 배럴에서 4배가량 증가하는 수치입니다. 세계 화학제품 생산용량의 10%가량이 추가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CNBC와 클라이밋홈뉴스 등 외신은 화석연료 기업이 플라스틱 등 화학 산업을 ‘플랜B’로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앞다퉈 화학단지 건설 나선 석유 기업들…OPIS “역사적 공급과잉 닥칠 것”
이밖에도 다음과 같은 석유 기업들이 화학단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 엑손모빌|중국 남부 광둥성에 2025년 완공을 목표로 100억 위안(약 1조 8,980억원) 규모의 석유화 단지를 건설 중이다.
2️⃣ 셰브론| 미 정유 기업 필립스66, 카타르 국영 석유기업 카타르에너지와 각각 합작 투자를 맺고 미국 텍사스주와 카타르 메사이드에 석유화학단지를 건설 중이다.
3️⃣ 로열더치쉘|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플라스틱 생산시설을 개장했다. 투자액만 140억 달러(약 19조 3,500억원)에 달하는 폴리에틸렌(PE) 생산시설이다. 2022년 11월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그 결과, 세계 폴리에틸렌 생산용량이 2023년 1억 4,700만 톤에서 2028년 1억 7,600만 톤으로 20%가량 급증할 전망이라고 미 에너지 데이터제공업체 OPIS는 밝혔습니다.
심지어 아람코의 C2C 전략은 반영되지 않은 전망입니다.
니콜라스 바피아디스 OPIS 화학시장 분석가는 “역사적인 공급과잉”이라며 “우리는 업계에서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OPIS는 글로벌 금융정보기업 다우존스 산하의 에너지 데이터·분석 기업입니다.
COP28 최대 성과, “플라스틱 풍선효과 될 수도” 🎈
기후협약에 따른 화석연료 사용 감축이 플라스틱 생산을 더욱 부추기는 요인이 될 수 있단 우려가 나옵니다.
이는 지난해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의 성과와 관련됩니다.
COP28 최종합의문에는 “에너지 시스템에서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이 명시됐습니다. 기후총회 역사상 최종합의문에 화석연료가 명시된 것은 최초입니다.
역사적 성과라는 평가와 함께 ‘에너지 시스템’으로 한정됐다는 점에서 아쉽단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플라스틱과 패션·농업 등 석유화학 제품을 원료로 사용하는 분야는 제외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18일 그리니엄과의 인터뷰에서 “연료 사용 감축으로 생기는 빈자리를 플라스틱으로 메꾸겠다는 것”이라며 “이것이 산유국의 생존전략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기후협약에서 줄인 화석연료가 플라스틱으로 몰려오는 풍선효과가 일어날 수 있단 뜻입니다.
홍 소장은 “기후협약과 플라스틱 국제협약은 (화석연료가) 연료로 가냐, 원료로 가냐의 차이”라며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자체를 차단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화석연료 기반의 플라스틱 수요를 억제하는 계획들이 더 확실하게 제시돼야 신규 플라스틱 생산시설 투자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에 대응하듯 산유국은 플라스틱 국제협약 논의에서 생산 감축 규제를 막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저렴한’ 플라스틱 중독, 끊기 위해선 에너지 전환 병행 🤝
한편, 플라스틱 및 화학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이 필요하단 의견도 나옵니다.
플라스틱이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 등의 부산물을 원료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저렴한 플라스틱의 비결은 일종의 ‘폐기물 재활용’이라 가능하단 것.
화석연료 기반 플라스틱의 경제적 비용우위는 재활용·퇴비화 플라스틱이나 지속가능한 화학 등으로의 전환을 어렵게 만듭니다. 실제로 중국산 저가 1차 플라스틱이 한국에 수입되면서 재활용 원료 시장이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고 홍 소장은 강조했습니다.
청정에너지 전환을 통한 화석연료 사용 감축만이 이러한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제언입니다.
석유화학 강국 韓은? “전통·신흥 기업 간 입장 갈려” 🇰🇷
그렇다면 석유화학 강국,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요?
한국은 비(非)산유국이지만 세계 5위의 화학 산업 강국이자 세계 4위의 에틸렌 생산 국가입니다. 석유를 수입해 정유·가공하는 석유화학을 수출 주력 산업으로 육성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가 플라스틱 국제협약 협상에서도 기업과 사회에 끼칠 영향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입니다.
국내 플라스틱 중소기업 제조업체의 99%가 중소기업이란 점도 플라스틱 감축·전환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플라스틱 규제가 곧 한국 석유화학 업계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습니다.
전통적인 석유화학 기업은 이미 생산시설 축소와 신사업 전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LG화학은 배터리 소재와 친환경 소재, 혁신 신약 등을 3대 신성장동력으로 추진 중입니다. 한화솔루션은 자회사인 한화큐셀을 중심으로 태양광 사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롯데케미칼은 배터리와 수소 사업을 중심으로 투자를 진행 중입니다.
석유 기업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막 화학 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쓰오일(S-OIL)은 사우디 아람코의 대규모 투자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비중을 높이고 있습니다. 9조 2,000억 원가량을 투자한 ‘샤힌 프로젝트’가 대표적입니다. 아람코의 TC2C 기술을 적용해 연간 최대 320만 톤의 석유화학 제품이 생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HD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 SK에너지 등 여타 4대 정유사 또한 폐플라스틱 재활용과 석유화학공장 투자를 확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