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등 기후대응 정책을 소홀히 해 고령자들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유럽 최고 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기후소송과 관련해 국제 법원에서 특정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AP통신·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지난 9일(이하 현지시각) 유럽인권재판소(ECHR)는 스위스 환경단체 ‘기후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클럽’ 소속 회원들이 스위스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측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판결에서 “스위스가 기후위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은 인권침해”라는 원고 측 주장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생활과 가족생활을 존중받을 권리’를 규정한 유럽인권조약 제8조를 인용했습니다. 재판부는 “기후위기가 삶과 건강, 복지 나아가 삶의 질에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에 대해 국가로부터 효과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는 조약에 포함된다”고 밝혔습니다.
쉽게 말해 정부는 기후위기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단 것이 재판부의 판결입니다.
이번 판결 결과에는 항소할 수 없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판결에 따라 단체에 8만 유로(약 1억 1,740만원)의 배상금을 3개월 안에 지급해야 합니다.
“기후정책 소홀” 스위스 여성노인들, 유럽인권재판소에 자국 정부 제소 ⚖️
만 64세 이상의 스위스 여성 2,500명으로 구성된 단체는 2020년 5월 유럽인권재판소에 정부를 상대로 인권침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단체는 2016년부터 스위스 정부의 기후정책이 생명권과 재산권을 침해한단 주장을 가지고 스위스 국내 법원에 3차례 대정부 소송을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대법원은 노인 여성의 권리가 침해됐단 점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27개 유럽연합(EU) 회원국을 포함해 유럽 47개국이 가입된 재판소입니다. 유럽인권조약을 바탕으로 유럽 내 인권에 관한 재판을 맡습니다. 공통의 가치를 지킨단 점에서 종종 ‘유럽 내 헌법재판소’로 불립니다.
단체는 유럽인권재판소에 기후변화로 인해 빈번해진 폭염이 생명권과 재산권을 위협한단 점을 언급했습니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노인 여성들에게 더 취약하단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폭염으로 메스꺼움과 의식 상실 등을 경험했다며 관련 의료기록을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 “스위스 기후대응 소홀 ‘인권침해’ 맞아”…항소 불가 🙅♀️
노인 여성은 폭염 취약계층으로 꼽힙니다. 실제로 작년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세계보건연구소가 과학저널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2022년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해 6만 1,000명이 사망했습니다.
연구팀은 폭염으로 인해 가장 힘든 여름을 겪은 집단을 여성 노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은 남성보다 여성이 56% 더 많았고, 사망자 절반은 80세 이상이었습니다.
원고 측은 이같은 연구 결과도 증거 기록으로 제시했습니다.
그 결과, 스위스 정부가 기후대응 정책에 소홀히 해 원고 측 권리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유럽인권재판소는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스위스 정부가 기후변화에 있어 조약에 따른 ‘적극적 의무’를 준수하지 못했다”며 “제출된 자료들을 볼 때 스위스 정부는 기후대응을 위한 입법이나 필요 조치를 제때 적절한 방식으로 취하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또 스위스 정부가 탄소예산이나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한도 책정에 실패하는 등 국내 규제 체계를 만드는 과정에 중대한 공백이 있었단 점도 짚었습니다.
“역사적인 승리”…스위스 정부 “판결문 분석 전까지 언급 자제” 🇨🇭
이번 소송을 제기한 기후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클럽은 홈페이지에 “역사적인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단체는 “노인, 환자, 어린이가 폭염과 기타 기후 영향으로 고통받고 있단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며 “(판결을 기반으로) 스위스 정부가 기후정책의 방향을 바로잡길 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비올라 암헤르트 스위스 대통령은 “판결문을 읽고 분석하기 전까지는 자세히 언급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50% 감소하고, 2050년에는 기후중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지난해 6월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구체적인 탄소중립 실행 정책이 담긴 기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법안은 오염자 부담 원칙에 따라 분야별 이산화탄소 배출량 주체에 부담금, 즉 탄소세를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다른 기후소송에도 영향 미치나? 🤔
나아가 이번 판결이 다른 사건에도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립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국제 법원이 특정 정부의 기후변화에 따른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컬럼비아대 법학전문대학원 산하 사빈센터에 의하면, 11일 기준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각국 정부에 제기된 기후소송 건수는 1,018건에 이릅니다. 이는 미국에서 제기된 기후소송 2,234건은 제외한 것입니다.
스위스 취리히대 기후소송 전문가인 코리나 헤이는 “(유럽인권재판소가 내린 결정은) 다른 기후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유럽과 세계 법원에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국제환경법센터 내 인권·기후환경 캠페인 관리자인 세바스티앙 두이크 또한 이번 법원의 판결이 스위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마이클 버거 사빈센터 전무이사는 “이번 판결은 각국 정부가 높은 수준의 기후정책을 추구하도록 요구한다”며 “향후 더 많은 국가에서 기후소송이 잇따를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특히, 미주인권재판소(IACHR)나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 등 국제기구에 제소된 기후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분석이 나옵니다. 이들 모두 기후변화 피해를 초래한 국가에 대한 법적 책임 강화를 촉구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이날 법정에 참석한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역시 “(이번 판결은) 기후소송의 시작일 뿐”이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구 상자의 모든 도구를 사용할 것”이라고 피력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 다른 기후소송 2건 기각 결정, 이유는?” 👀
다만, 같은날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부의 기후대응에 소홀해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주장한 다른 2건의 기후소송에 대해서는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유럽 33개국 정부를 상대로 기후소송을 제기한 포르투갈 청소년 6명에 대해서는 “포르투갈 외 국가에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프랑스 북부 소도시 그란드 신테의 전(前) 시장이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역시 기각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프랑스를 떠나 제소 권한이 없단 것이 재판부의 판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