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테슬라 대항마로 꼽혔던 미국 전기자동차 스타트업 피스커가 상장 폐지를 통보받았습니다.
지난 25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는 피스커에 대한 상장 폐지 절차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거래소는 피스커의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낮다”고 지적하며 현재 상장요건에 적합하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회사 주식 거래가 즉각 중단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날 오전 뉴욕증시에 상장된 피스커 주식은 갑작스러운 폭락으로 거래가 정지됐습니다.
거래 정지 직전 피스커 주가는 0.896달러(약 1,200원)를 기록했습니다. 전날 대비 28.17%, 연초 대비 95%가량 폭락한 수치입니다.
현재 피스커는 채무조정이나 부채 리파이낸싱(재융자) 등 전략적 대안을 평가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자동차 업계에서는 피스커가 파산 수순을 밟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합니다.
전기차 업계 ‘애플’ 자처한 피스커 🍏
피스커는 덴마크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헨릭 피스커가 2016년에 설립한 스타트업입니다. 사측은 그간 전기차 업계의 애플을 자처해 왔습니다.
애플은 자사 제품을 설계하는 대신 생산은 아웃소싱(외부생산)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피스커는 이같은 애플의 방식을 전기차 사업에 접목했습니다.
실제로 피스커는 자체 공장을 설립하는 대신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제조사 마그나슈타이어에 차량 조립을 맡겼습니다. 마그나슈타이어는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등 주요 완성차 기업으로부터 위탁받아 차량을 생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산시설에 투입할 자본은 줄이고 전기차 생산은 더 빠르게 앞당기겠단 것이 피스커의 당초 계획이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전기차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것으로 기대받았습니다.
그 결과, 2020년 피스커는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과의 합병을 통해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에 성공합니다. 피스커는 상장 당시 약 29억 달러(약 3조 9,000억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았습니다.
2023년 피스커 첫 전기차 출시…“IRA 여파·품질 논란에 판매 부진” 💸
그러나 피스커는 2022년 첫 전기차 생산을 앞두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발단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입니다. 해당 법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에너지·기후 정책입니다. 동시에 북미 전기차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대규모 보조금(세액공제)을 지급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피스커의 위탁생산 공장이 오스트리아에 위치했단 것입니다. 이에 피스커는 미국 현지 생산기업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실패합니다. 결국 피스커는 IRA에 따른 보조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여기에 신차 출시 전 소프트웨어 결함이 발견되며 출시 일자도 지연됐습니다. 품질 논란은 2023년 6월, 첫 전기차 모델 ‘오션’이 출시된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주행 중 급작스러운 차량 시동 꺼짐과 차량 잠금 오작동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피스커는 미 도로교통안전국(NHTSA)으로부터 차량 결함으로 2차례 조사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사측은 2023년 오션 생산량 예측을 당초 4만 2,400대에서 1만 3,000대까지 낮췄습니다. 실제 생산량은 그보다 적은 1만여대에 그쳤습니다. 고객에게 인도된 실제 차량수도 4,900여대에 불과합니다.
유동성 위기 닥친 피스커 “닛산 협상 결렬에 결국 상장 폐지” 💥
거듭된 악재와 판매 부진에 피스커는 자본 부족을 호소해 왔습니다.
사측은 지난달 29일 공개한 연례 보고서에서 유동성 문제를 공식 인정합니다.
연례 보고서에 의하면, 피스커는 2023년 4분기에만 총 4억 6,360만 달러(약 6,251억원) 규모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같은기간 매출은 2억 200만 달러(약 2,724억원)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 보고서에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피스터에 대해 “기업으로서의 존속 능력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제기할 수 있다”는 평가도 담겼습니다.
미 경제전문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의하면, 피스커의 현금 보유액은 지난해 12월 말 3억 2,500만 달러(약 4,382억원)에서 3월 15일 기준 8,910만 달러(약 1,201억원)로 급감했습니다.
이후 대형 자동차 기업과의 투자 협상 소식이 지난 1일 알려지며 사태는 진정되는 듯 했습니다.
이는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 닛산자동차로 알려졌습니다. 당초 닛산은 피스커에 4억 달러(약 5,400억원) 이상을 투자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그 대신 닛산이 피스커의 전기픽업트럭 플랫폼(차량 골격)을 사용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25일 피스커는 해당 협상이 결렬됐단 소식을 전합니다. 같은날 오전 뉴욕증시에 상장된 피스커 주가는 폭락했고, 끝내 거래소의 상장 폐지 통보로 이어졌습니다.
거래소에 따르면, 거래일 30일 동안 주가 1달러 미만 또는 시가총액 1,500만 달러(약 202억원) 미만을 유지할 경우 상장 폐지됩니다.
피스커는 앞서 지난 2월 거래소로부터 낮은 주가로 인해 경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피스커 주가는 이미 올해 1월 16일 0.97달러를 시작으로 2달 연속 1달러 미만이 유지됐습니다.
디폴트 위기 맞은 피스커, 살아날 수 있을까? 🤔
현재 피스커는 구조조정과 함께 자산 매각을 포함한 전략적 대안을 고려하는 중으로 전해졌습니다.
주식이 상장 폐지될 경우, 피스커는 2026년 만기인 전환사채(CP)를 재매입해야 합니다. 2025년 만기의 선순위 전환사채는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했습니다.
거래소는 피스커가 거래소의 상장 폐지 결정을 검토할 권리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상장 폐지 통보 후 피스커는 지난 13일 체결된 1억 5,000만 달러(약 2,025억원) 규모의 조달 계약도 무산됐습니다. 대형 자동차 기업과의 협상이 거래 조건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사측은 “현재 2025년과 2026년 채권의 금액을 충족할 수 있는 현금 보유액이나 자금 조달원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피스커는 추가 재정 확보를 위해 자사 전기차 모델인 오션의 가격을 대폭 인하한다고 지난 27일 발표했습니다. 기존 3만 7,499달러(약 5,060만원)에서 2만 4,000달러(약 3,240만원)로 약 40%가량 인하한 것입니다.
WSJ “피스커 실패, 애플夢 아닌 중국夢 배워야” 📕
한편, 피스커의 실패가 애플을 벤치마킹한 사업 모델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라는 WSJ은 지적했습니다.
WSJ은 애플과 나이키의 사례처럼 아웃소싱은 매혹적인 아이디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은 이들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매체는 꼬집었습니다.
나이키는 디자인, 애플은 운영체제가 핵심이란 점에서 아웃소싱이 가능했지만 자동차 산업은 다르단 것입니다.
자동차 산업의 특성상 생산 그 자체가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기 때문에 “저비용으로 아웃소싱하기가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실제로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같은 완성차 기업들도 일부 추가 물량이나 소량의 특수 제품만 아웃소싱을 활용하는데 그칩니다.
이 때문에 WSJ은 “피스커의 자금이 고갈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일갈했습니다.
그러면서 WSJ은 전기차 스타트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국 전기차 기업의 ‘빠른 속도’를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서구 기업이 신차를 내놓기까지 평균 4년 이상 걸리는 데 비해 중국 기업은 2년 반가량에 불과하단 것. 중국의 기성 완성차 기업들도 스타트업처럼 운영된다는 것이 WSJ의 평가입니다.
구체적으로 ▲소프트웨어 중심 개발 ▲가상테스트를 이용한 실험기간 단축 ▲수직계열화 등이 비결로 꼽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