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일으킨 대규모 환경 오염에 책임을 묻고자 유럽연합(EU)이 칼을 빼 들었습니다.
기업의 중대한 환경범죄와 관련해 경영진에 대해 구속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EU 환경범죄지침(ECD)’ 개정안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27일(이하 현지시각) 열린 유럽의회 본회의 투표 결과, 찬성 499표·반대 100표·기권 23표로 해당 개정안은 통과됐습니다.
해당 개정안은 작년 11월 EU 집행위원회·EU 이사회·유럽의회 내 3자간 잠정 합의를 거친 바 있습니다. 이번 유럽의회 투표는 개정안 발효를 위한 형식적 절차입니다.
개정안은 EU 공식 관보에 게재된 후 발표됩니다.
‘에리카호 해양오염’에 EU 내 기업 환경오염 법적 책임 필요성 대두 🚢
EU의 환경범죄지침을 알기 위해선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해 12월 12일 프랑스 브르타뉴 근해에서 몰타 선적의 유조선 ‘에리카호’가 침몰했습니다.
에리카호는 당시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두 동강이 나며 침몰합니다. 이 때 200만 톤 이상의 원유가 유출되며 프랑스 사상 최악의 환경오염으로 기록됐습니다.
이후 2008년 프랑스 재판부는 에리카호와 용선계약을 맺은 프랑스 에너지 기업 토탈에너지스와 에리카호 선주와 경영자 모두에게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 판결을 계기로 EU 차원에서 기업의 환경오염에 법적 처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2008년 도입된 것이 바로 환경범죄지침입니다.
유럽환경청 “환경범죄 EU에서 수익성 좋은 사업…처벌 낮은 탓” 🤔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환경오염의 종류가 다양해졌고, 오염 수준도 높아졌단 것. 반면, 지침은 이같은 변화를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2020년 유럽환경청(EEA)은 보고서를 통해 “환경오염에 대한 처벌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EEA는 사례 중 하나로 ‘디젤게이트 사건’을 언급합니다. 이는 폭스바겐그룹을 비롯한 유럽 완성차업체들이 유해한 질소산화물 배출로 비판받아온 디젤 자동차의 배출가스량을 조작해온 사실이 2015년 뒤늦게 발간된 사건을 일컫습니다. 차량 내 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를 조작한 덕분이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독일을 비롯한 각국에서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와 관련해 EEA는 해당 사건은 기존 독일 형법으로는 처벌이 어려웠단 점을 언급했습니다.
기존 환경범죄지침은 개별 회원국의 법률하에서는 불법적인 행위가 있을 때만 환경범죄 처벌이 가능합니다. 기업이 허가 조건을 준수하는 한 환경범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에 EEA는 “환경범죄는 EU에서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라며 처벌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환경범죄 저지른 기업 경영진 최대 8년 징역…연 매출 5% 과징금 부과” ⚖️
그 결과, EU 집행위는 2021년 12월 ‘환경보호지침’ 개정안 초안을 발의합니다. 이후 여러 논의 끝에, 지난해 11월 EU 이사회·유럽의회와 3자간 합의에서 개정안은 잠정 채택습니다.
지침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환경범죄 목록은 기존 9개에서 18개로 늘어났습니다.
▲불법 벌목 ▲불법적 수자원 추출 ▲EU 화학법 중대 위반 ▲선박에 의한 환경 오염 ▲대형산불이나 기타 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이 새로운 환경범죄 목록에 포함됐습니다.
침입성 외래종 도입 및 확산, 오존층 파괴 역시 새로운 환경범죄 목록에 명시됐습니다. 다만, 초안과 달리 EU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독성폐기물을 보낸 경우는 환경범죄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개정안에 따라 허가 받은 사업을 진행하면서 환경범죄에 연루된 경우도 처벌 대상이 된단 것입니다. 즉, 정부가 허가한 사업을 준수하더라도 환경범죄가 발생할 시 형사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단 것입니다.
나아가 환경범죄를 저지른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이사는 최대 8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환경범죄가 피해자의 사망으로 이어질 시 10년의 징역형도 가능합니다. 기타 범죄는 최대 5년의 징역형이 가능하단 문구도 명시됐습니다.
이같은 환경범죄를 저지른 기업은 연 매출의 5%에 해당하는 과징금이 부과됩니다.
물론 27개 EU 회원국은 지침을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자국 사정에 따라 과징금 비율과 액수를 결정합니다. 과징금 비율은 3~5% 사이, 액수로는 2,400만~4,000만 유로(약 346억~577억원) 사이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역외에서 EU 기업이 저지르는 환경범죄 처벌 여부도 회원국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과징금 액수 등에서 회원국 간 일부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나, 불법 벌목 등 새로 추가된 지침상의 환경범죄 정의 EU 역내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생태학살 ‘에코사이드’ 국제형사재판소서 국제범죄로 인정받나? 🌲
한편, 유엔환경계획(UNEP)과 국제형사경찰기구(INTERPOL)에 의하면, 환경범죄는 연간 약 2,580억 달러(약 343조원) 규모입니다. 이는 마약·무기·인신매매 다음으로 4번째로 많은 범죄입니다.
한편, 마리 투상 녹색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은 “환경범죄는 세계 경제보다 2~3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며 “(이번 개정안 통과는) 환경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관행의 종식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일각에서는 생태학살, 즉 ‘에코사이드(Ecocide)’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현재 ICC는 전쟁범죄·반인륜범죄·집단학살·침략범죄 등 4가지를 국제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자연환경을 훼손한 생태학살 또한 심각한 범죄행위로 간주하고 5번째 국제범죄로써 법적 책임을 물리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의 ‘프로미스 인권 연구소’의 케이트 맥킨토시 이사는 기후전문매체 그리스트에 “다른 나라들이 먼저 생태학살을 법으로 채택하지 않는 이상 ICC가 생태학살을 채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맥킨토시 이사는 모든 국제법은 국가 차원에서 선례가 있어야 한단 점을 언급했습니다.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달 23일 벨기에는 생태학살로 인한 책임을 묻는 형법 개정안을 승인했습니다. 유럽을 넘어 세계에서 첫 사례입니다.
벨기에 일간 브뤼셀타임스에 따르면, 일명 생태학살법에 따라 심각하고 대규모인 환경범죄에는 최대 징역 20년과 160만 유로(약 23억원)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저작권자(©) 그리니엄,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