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천연, 생분해성, 에코, 기후중립. 이르면 오는 2026년부터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에서 사용할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지난 17일(이하 현지시각) 프랑스 스트라스부스에서 유럽의회 본회의가 열린 가운데 ‘녹색전환을 위한 소비자 권리 강화(Empowering consumers for the green transition)’ 지침이 찬성 593표로 통과됐습니다. 반대와 기권은 각각 21표와 14표에 그쳤습니다.
이번에 통과된 지침은 EU 집행위원회가 공개한 ‘그린클레임 지침(GCD)’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 지침은 기업들이 자사·제품·서비스에서 친환경성을 주장하기 위해선 원자재부터 최종제품까지 전생애주기(LCA)에 걸쳐 환경적 영향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을 막는 것이 주요 목표인 만큼, 한국에서는 ‘친환경 표시지침’으로 불립니다.
그린워싱 방지 위한 지침…“EU 이사회 통과만 남아” ⚖️
유럽 소비자보호협력네트워크(CPC)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EU 역내 제품·서비스 내 친환경 주장의 53%가 모호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또 40%가량은 근거가 없었습니다.
EU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친환경 라벨 230개 중 절반가량은 검증 절차가 매우 약하거나 미흡하단 지적도 있습니다.
EU 집행위는 이들 조사를 인용하며 “기업의 친환경 주장을 과학적인 증거로 입증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에 추진된 것이 그린클레임* 지침입니다.
소비자의 지속가능한 결정을 돕고자 그린워싱 위험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린워싱이 지속가능한 제품·서비스 확산을 방해한단 것이 EU 집행위의 설명입니다.
이번에 유럽의회를 통과한 법안은 EU 이사회 최종 승인만 남겨둔 상황입니다.
EU 집행위와 유럽의회 모두에서 찬성 의견이 압도적이었던 만큼, 남은 승인도 신속하게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EU 이사회 검토 자체는 형식적 절차로 여겨집니다. 이미 작년 9월 EU 회원국 간 포괄적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단 법안이 최종 발효되면 EU 회원국들은 2년 내로 자국법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규정을 도입해야 합니다.
법안 통과 직후 유럽의회 의원인 빌라냐 보르잔은 “그린클레임 지침은 모든 유럽인의 일상을 바꿀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린클레임(Green claim): 생분해성, 재활용 가능, 바이오 기반, 탄소중립 등 기업이 자사 제품·서비스의 친환경성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하는 ‘친환경 주장’을 일컫는다.
“친환경·생분해 등 주장 위해선 제3자 기관의 과학적 입증 필요” 👀
보르잔 의원의 말처럼 그린클레임 지침은 EU 역내 모든 산업과 기업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EU에 수출하는 국외 기업들도 적용 대상입니다.
지침에 따르면, 27개 EU 회원국에서 제품이나 서비스에 친환경 주장·라벨을 표기하기 위해선 회원국이 인증한 독립된 검증기관(제3자 기관)으로부터 해당 내용을 입증해야 합니다.
또 친환경 주장·라벨이 실제로 어떻게 도움이 된단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한 후 입증해야 합니다.
예컨대 EU에서 ‘기후중립’이란 라벨을 붙인 스마트폰을 판매하기 위해선, 해당 스마트폰이 어디서 어떤 식으로 광물이 채굴됐는지 정보를 공개해야 합니다.
또 원재료 추출부터 제품 생산과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나온 배출량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기후중립이란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지 현실적인 이행 계획도 내놓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독립된 검증기관으로부터 검증받아야 합니다.
독립된 검증기관의 조건도 까다롭습니다. 지침에는 “독립적이고, 이해상충이 없고, 환경문제에 경험과 역량을 갖춰야 한다”며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이때 사용된 방법론도 공개돼야 합니다. 각 회원국이 이같은 검증을 감독할 국가 관할 기관을 정해야 한단 내용도 담겼습니다. 기존 규제 기관일수도 있고 신규 기관이 창설될 수도 있단 전망이 나옵니다.
EU 집행위는 법안 발효 5년 후에 이행 상황을 점검할 예정입니다.
“기후중립·탄소감축 등 탄소상쇄 의존한 단어 사용도 광고서 전면 금지” 😮
탄소상쇄에 의존한 친환경 단어도 사용이 전면 금지됩니다.
재조림이나 재생에너지 시설 설치 등 기업이 다른 곳에서 배출량을 상쇄한 뒤 이를 여러 용어로 사용해 왔습니다. 탄소상쇄를 통해 기후중립이나 탄소중립을 달성했단 표기가 대표적입니다.
당초 EU 집행위의 초안에서는 탄소상쇄를 금지하는 대신 엄격한 기준을 전제로 한단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러나 유럽의회 내부에서는 EU 집행위가 허용한 탄소상쇄를 금지해야 한단 의견에 힘이 실렸습니다. 불충분한 정보제공이나 이중계산 등 탄소상쇄에 허점이 많단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 결과, 탄소상쇄를 기반으로 한 ▲기후중립 ▲탄소중립 ▲탄소감축 같은 단어를 모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작년 9월 유럽의회는 EU 집행위와 탄소상쇄도 금지하는 방향으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유럽의회는 성명을 통해 “기업이 더는 어딘가에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플라스틱병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며 “이를 구체적으로 검증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럽의회 내부시장위원회(IMCO) 위원장인 안나 카바치니 또한 “탄소상쇄를 기반으로 하는 ‘기후중립’이나 ‘기후긍정’ 같은 주장이 EU 시장에서 완전히 금지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카바치니 위원장은 이어 “기후프로젝트에 대한 기업 투자는 환영해야 한다”면서도 “열대우림에 나무를 심는다고 자동차 생산이나 월드컵 개최, 화장품 생산이 기후중립적이란 말이 더는 나와선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주요 시민단체는 법안 통과에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비영리단체 카본마켓왓치(CMW)의 탄소시장 분석가인 린제이 오티스는 “탄소중립 비행기를 타고, 탄소중립 옷을 입고, 탄소중립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근거없는 광고의 종말을 알리는 날”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내구성 등 제품 내 순환성 정보 모두 대중에 공개 🛠️
지침에서 눈여겨볼 내용 중 하나는 순환성입니다.
기업이 광고에서 자사와 타사 제품을 비교해 판매할 시 소비자에게 제품의 내구성·수리가능성·재활용 가능성 같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단 내용도 명시됐습니다. 이 정보는 최신 상태로 유지해야 한단 문구도 포함됐습니다.
제품 판매 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비자에게 제품의 수리 가능성과 내구성 관련 정보가 제공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신 정보로 유지돼야 합니다.
내구성과 관련해 근거 없는 홍보도 금지됩니다. 가령 세탁기 수명이 실제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5,000회 세탁 가능’과 같은 문구를 사용할 시 과징금이 부과됩니다.
모든 정보는 QR코드나 홈페이지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돼야 합니다. 보증 기간이 연장된 제품은 소비자가 눈에 더 짤 띌 수 있도록 하는 표준 라벨도 새로 마련될 예정입니다.
단, 제품 수명 연장이나 수리 용이성 관련 의무가 없단 점은 한계로 지적됩니다.
이에 유럽환경청(EEB)은 성명을 통해 지침에 제품의 조기노후화(계획적 구식화)를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 빠진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조기노후화란 기업이 의도적으로 제품 수명을 단축하거나 조기 오작동을 유발하도록 제품을 설계해 소비자의 반복적인 구매를 유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EU에 수출하는 韓 기업도 주의 필요”…지침 위반 시 과징금 부과 💸
한편, 기업이 지침을 위반할 시 연매출의 최소 4%에 해당하는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또 추가로 EU의 공공자금 조달이나 보조금 지급에서 최대 1년간 제외될 수 있습니다. 물론 EU 이사회의 입법 과정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연간 매출액이 200만 유로(약 29억원) 미만, 직원 규모가 10명 미만인 소기업은 지침 적용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EU에 수출하는 한국 기업들도 이 지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침 발효 시 ‘재활용 원료 포함’ 등의 문구도 검증된 경우에 한해서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제품의 친환경성으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이 생물다양성 손실 등 또다른 환경오염을 악화시키지 않았는지 여부도 확인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EU로 수출하는 우리 기업들도 마케팅 전반을 점검하고,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단 제언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