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최고경영자(CEO)인 래리 핑크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용어를 더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핑크 CEO는 지난 2020년 연례 서한에서 기업의 기후대응에 따라 투자 방침을 결정하겠다고 밝히며 ESG 트렌드에 불을 붙였습니다.
지난 26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핑크 CEO는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아스펜 아이디어 페스티벌(Aspen Ideas Festival)*에서 “앞으로 정치화된 ESG 용어 사용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핑크 CEO는 “ESG 용어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무기가 됐다”면서도 “(그러나) ESG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꾸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블랙록의 ESG 투자가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핑크 CEO는 “탈탄소화 및 기업 지배구조 등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에 대해 이해관계가 있는 기업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핑크 CEO는 올해 1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ESG 담론이 기업이 아닌 개인의 정치에 이용돼 사회가 양극화되는데 일조했다”며 “ESG 개념이 추해졌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아스펜 아이디어 페스티벌: 미국 NBC 유니버설 뉴스그룹과 파트너십으로 진행되는 연례 행사다. 전 세계 분야별 리더들이 모여 아이디어와 혁신을 교환하는 자리다.
美 공화당 집권 주 중심으로 반(反) ESG 정책 확산 🗺️
핑크 CEO 덕에 ESG 경영이 세계적인 트렌드가 됐습니다. 여기에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가 더해지며 미국 내에서 ESG 투자는 지난 10년간 크게 성장했습니다.
미국 사회책임투자포럼(US SIF)에 따르면, 2022년 미국 투자자들이 ESG 부문에 투자한 금액은 8조 4,000억 달러(약 1경 966조원)였습니다. 이는 미국 총자산의 13%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미국 대형 로펌 모건루이스(Morgan Lewis)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미국 내에서 발의된 ESG 반대 법안은 총 99건입니다. 지난해 같은기간보다 39건 더 급증한 것입니다. 이중 7건은 법으로 제정됐고, 20건은 폐기됐습니다. 나머지 72건은 계류 중입니다.
ESG 반대 법안을 주장하는 측은 ESG가 재무 목표보다 정책·사회 목표를 우선시할뿐더러, 자금조달을 제한하여 지역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합니다.
플로리다 등 일부 주정부 블랙록서 연기금 5조 회수, 그 이유는? 🤔
블랙록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도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지난해 6월 공화당은 블랙록이 ‘오크 자본주의(Woke Capitalism)’를 부추긴다고 비판했습니다. 미국 민주당이 이를 옹호하자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국내에서는 ‘깨어있는 자본주의’로도 불리는 오크 자본주의. 기업이 온실가스 배출과 인종 그리고 젠더 등 ESG 이슈나 정치 현안에 진보적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정치적 논쟁 속에서 반(反) ESG 움직임은 가속화됐습니다. 같은해 8월 ESG 반대 측 19개 주 법무장관은 핑크 CEO에서 ESG 투자 정책을 비판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일부 주정부의 경우 주 연기금이 투자이익 극대화 이외의 목적으로 ESG 요인을 고려하는 자산운용사에 자산을 위탁하는 것을 금지하고, 투자금도 회수했습니다. 플로리다·루이지애나·미주리·애리조나·웨스트버지니아 주정부가 대표적입니다.
블랙록은 반 ESG 정책을 추진하는 주정부들로부터 약 40억 달러(약 5조 2,200억원)의 운용 자산이 회수됐다고 밝혔습니다.
이중 절반인 20억 달러(약 2조 6,100억원)는 플로리다주가 회수했습니다. 플로리다주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지미 패트로니스는 “블랙록의 ESG 목표는 지나치게 사회공학적”이라며 “주주들의 재무 수익 극대화는 상반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블랙록은 성명을 통해 “미래지향적 투자를 저해하고 수익성을 결국 훼손할 정치적 움직임을 우려한다”며 “이는 결국 플로리다 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블랙록 CEO “ESG 용어, 정치적 무기 돼” 😢
이밖에도 블랙록은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텍사스주에서 투자 보이콧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텍사스 주정부는 역내 석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에너지 차별 철폐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화석연료 관련 산업과 거래를 거부하는 기업은 텍사스에서 사업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텍사스주는 화석연료 기업과 거래를 거부하는 금융기관 및 펀드의 목록을 작성해 궁극적으로는 투자를 배제하도록 했습니다.
즉,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 해당 목록에는 블랙록의 이름도 올라갔습니다.
핑크 CEO는 올해 1월 세계경제포럼(WEF)에서 ESG에 대한 정치적 반발로 약 4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주정부가 블랙록에서 회수한 연기금 액수입니다. 그는 이 액수는 블랙록 전체 운용자산 9조 달러(약 1경 1,710조원) 중 극히 미미한 부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 또한 반(反) ESG 운동이 실제 투자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분석한 바 있습니다.
ESG 반대 움직임 속 ‘넷제로보험연합’ 회원사 탈퇴행렬…“30곳 → 12곳” 🏃
한편, ESG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블랙록을 넘어 여러 기업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2일(현지시각) 넷제로보험연합(NZIA) 회원사 중 15곳이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여기에는 프랑스 악사(AXA), 독일 알리안츠(Allianz) 등 NZIA 창립회원 5곳도 포함됐습니다.
일본 4대 보험회사(도쿄해상·손보재팬·미쓰이스미토모해상·아이오이닛세이동화손보)와 우리나라 삼성화재도 탈퇴한 상황입니다. 호주 보험사그룹(IAG)와 캐나다 보험회사 베네바(Beneva)도 지난 20일(현지시각)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기존 30곳에 달했던 NZIA 회원사는 현재 12곳만 남은 상태입니다.
2021년 유엔환경계획(UNEP) 주도로 설립된 NZIA.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보험사 간의 협의체입니다. NZIA 회원사는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보험상품 및 서비스 개발 그리고 자산운용 등에서 직간접적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NZIA는 5년 주기로 감축 목표를 정하고 매년 감축 현황을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NZIA 탈퇴행렬이 줄을 잇는 데는 미국 내 ESG 반대 움직임이 영향을 끼쳤단 분석입니다. 다국적 재보험사는 해외 부문 매출 비중이 크며, 이중 세계 1위 보험시장인 미국 시장 실적이 전체 매출을 좌우합니다.
특히, 공화당 소속 23개 주 법무장관이 지난 5월 15일(현지시각) NZIA 회원사에 보낸 경고서한이 탈퇴행렬에 영향을 미쳤단 평가입니다.
법무장관들은 서한에서 보험사가 연합해 고객사와 투자 대상 회사에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반독점법(Antitrust laws)’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쉽게 말해 보험업체들이 협력해 탈탄소에 대응하는 시스템이 반독점법 대상인 카르텔에 해당될 수 있단 것.
실제로 세계 1위 재보험사인 뮌헨리(Munich Re)는 지난 3월말 NZIA 탈퇴 이유에 대해 반독점법 리스크 노출 우려를 직접적으로 밝혔습니다.
다만, NZIA에서 탈퇴한 보험사 대부분은 탄소중립에 대한 약속은 변함없이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