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농기계 기업 존 디어의 자가수리 허용, 농부들의 ‘트랙터 해방’ 가능해질까

화이트해커까지 농기계 ‘자가수리’ 전쟁 가세

미국 농기계 제조업체인 디어앤코(Deere and Co)가 자사 제품에 대해 농부들이 자가수리를 허용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미국농민연맹(AFBF)과 지난 8일(현지시각) 체결했습니다.

디어앤코는 세계 1위 중장비 농기계 브랜드인 ‘존디어’를 보유한 기업입니다. 존디어를 포함한 디어앤코의 농기계 내장 소프트웨어에는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던 탓에 농부들은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공인업체에 수리를 받아야 했습니다.

애플의 자가수리 프로그램 도입에 이어 전 세계 자가수리권 운동이 또 한걸음 진전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상황. 디어앤코의 자가수리 허용이 왜 이렇게 주목을 받는지, 그리니엄에서 살펴봤습니다.

 

▲ 미 농기계 브랜드 존디어의 존 메이 CEO가 5일(현지시각) 개막한 CES 2023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CES

세계 최대 농기계 브랜드 ‘존디어’ 보유한 디어앤크, 자가수리 허용 발표해 🛠️

디어앤코는 세계 시장 점유율 32%에 달하는 세계 1위 중장비 농기계 브랜드인 ‘존디어’를 보유한 기업입니다. 앞서 지난 8일까지 개최된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박람회 CES 2023에선 자율주행 트랙터으로 CES 혁신상을 수상해 주목을 받은 바 있는데요.

존디어는 ‘트랙터의 컴퓨터화’에 선도적인 기업입니다. 동시에 ‘자가수리권(Right to Repair)’운동 전선의 최전선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소비자가 직접 수리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자가수리권. 수리 비용 부담도 낮추면서 제품 수명을 늘려 폐기물 발생을 줄일 수 있는데요. 이 때문에 순환경제 전환의 주요 솔루션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문제는 존디어 농기계의 소프트웨어에 공인 기술자만이 비활성화할 수 있는 잠금 장치가 걸려있다는 것. 심지어 사측이 원하면 언제든 원격으로 기계를 종료할 수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농부는 자체 수리나 독립 기술자를 통해 저렴하게 수리하는 대신, 비교적 높은 비용의 공인 딜러를 통해야만 했습니다.

이번 MOU 체결 덕에 농부들은 존디어 등 디어앤코 제품에 한해 자가수리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디어앤코는 미국 50개 주(州) 전 지역의 농부와 사설 기술자 모두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조건으로 소프트웨어·진단도구·교육 등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입니다.

자가수리·사설수리를 받은 이후에도 소프트웨어 구입 기회를 제공하고 제3자의 부품 획득을 방해하지 않는 등 자가수리에 대한 차별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나왔는데요.

대신 농부와 사설 기술자는 기계의 안전 기능을 손상시킬 정도로 제품을 수정 혹은 해킹으로 소프트웨어를 수정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협약서에 명시됐습니다.

 

▲ 2016년 존디어가 자가수리를 금지하도록 라이선스 계약을 갱신하면서 전 세계 많은 농부들이 트랙터 해킹에 뛰어들었다. ©Freethink

존디어 VS 농부의 ‘트랙터 해방 전쟁’, 그 시작은? 🚜

그런데 존디어는 왜 자가수리권 운동의 최전선으로 여겨졌던 걸까요?

그 시작은 201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존디어는 라이선스 계약을 갱신하면서 농부들에게 농기계에 대한 거의 모든 수리·개조를 금지하는 내용에 동의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존디어는 소프트웨어 수정으로 인한 안전문제 등을 예방하기 위함이라며 농부에게 이익이 되는 조치라 설명했는데요.

해당 조치는 곧바로 전 세계 농부들의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농부들은 수십만 달러의 장비를 구입하고도 스스로 수리를 결정할 권리를 갖지 못한단 것에 적극 항의했는데요.

이를 계기로 농부들이 전자제품 분야에서 확산되던 자가수리권 운동과 만나며 ‘트랙터 해방 전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2017년을 전후로, 암시장에서는 불법 복제된 존디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등장했는데요.

대부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에서 해킹·복제된 후 미국 농부들에게 재판매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농부들은 많게는 수천 달러에 달하는 수리비를 아낄 수 있었습니다.

 

▲ 존디어의 트랙터 제어장치에 옥수수 농장 테마의 고전게임 ‘둠(DOOM)’이 설치되어 있다. 화이트해커 식코드는 2022년 8월 세계최대 해킹·보안 콘퍼런스 데프콘에서 존디어 제어장치를 해킹하고 게임을 설치, 플레이하는 과정을 공개했다. ©Kyle Wiens, 트위터

화이트해커까지 가세한 농기계 ‘자가수리’ 전쟁 🥊

이후 농부들의 쏟아진 항의에 미국 의회에선 자가수리권 관련 법안 제정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러자 2018년 9월 존디어를 비롯한 제조업체가 포함된 북미 농기계딜러협회(EDA)가 항복을 선언합니다. EDA가 미 캘리포니아주 농장국과 MOU를 맺고 2021년 1월 1일부터 존디어 및 기타 트랙터 생산기업이 수리 도구·소프트웨어·진단도구 등을 대중에게 제공할 것을 약속한 것인데요.

그러나 4년이 지나도록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2022년, 의외의 장소에서 트랙터 자가수리 운동이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그해 8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최대 해킹·보안 콘퍼런스 ‘데프콘(DEF CON)’입니다.

화이트해커 그룹 식코드(Sick Codes)는 콘퍼런스에서 존디어 트랙터의 제어장치를 해킹하고 고전게임 둠(DOOM)을 설치해 플레이하는 전 과정을 공개했습니다.

식코드는 농업장비의 보안 취약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농부들이 스스로 트랙터를 수리할 수 있단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해당 작업에 도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온라인 수리 커뮤니티 아이픽스잇(iFixit)의 공동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카일 빈스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자가수리권에 대한 관심에 환영을 표했습니다.

 

▲ 지난해 12월 29일(현지시각) 캐시 호컬 뉴욕주지사는 주에서 발의된 ‘디지털공정수리법’에 서명했다. ©SecuRepair

자발적 프로그램 VS 법제화, 자가수리권의 앞날은? 🤔

이후 존디어는 자가수리권에 대한 언급을 아꼈습니다.

지난 8일 갑작스러운 자가수리 허용 발표에도 환영의 목소리와 함께 이번 MOU가 실질적으로 이행될 것인지에 대한 우려도 나오는데요. 2018년 캘리포니아 농장국과의 MOU도 계속 연기돼 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발표가 다시금 주목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지난해 미국 최초로 통과된 ‘디지털공정수리법(Digital Fair Repair Act)’입니다.

뉴욕주에서 발의된 해당 법안에 따르면, 2023년 7월 1일 이후 출시된 모든 전자제품((가전제품·차량·의료장비 제외)은 수리부품·수리설명서·수리도구 등에 관한 정보를 소비자에게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이 법안은 지난해 6월 미국 뉴욕주 의회 상하원 모두 통과 후 그해 12월 29일(현지시각) 케시 호컬 뉴욕 주지사가 서명해 입법 절차를 마쳤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국 곳곳에서 자가수리권 법안 제정 논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 2021년 기준 미국 내 수리권 법안 발의 현황 인포그래픽화. ©The Repair Association 제공

존디어의 이번 MOU 체결 또한 법제화에 앞서 자체적인 대응으로 자가수리권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한편, 존디어-AFBF의 협약서에는 “(AFBF가) 연방 또는 주(State)의 ‘수리할 권리’ 법안을 도입, 홍보 또는 지원하지 않도록 동의한다”는 문구가 담겼습니다. 주 또는 연방에서 자가수리권 법안이 발효되면 두 단체의 계약은 철회된단 문구도 명시됐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 공익연구그룹(US PIRG)의 수리권 캠페인 책임자인 케빈 오라일리는 “수리권 법안을 맥빠지게 하려는(wind out of the sails) 노력일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저작권자(©) 그리니엄,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AI학습 이용 금지

댓글 쓰기

관련 기사

순환경제, 정책

노르웨이 국제개발부 장관 “11월 플라스틱 국제협약 논의서 타협 없을 것”

순환경제, 정책

환경부, 일회용컵 보증금제 대신 무상제공 금지 검토…추진 과정서 ‘여론전’ 의혹 제기

그린비즈, 산업

인권·환경 실사 등 EU 공급망실사법 대응은? 대한상의 “CSDDD 가이드북 발간”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