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순환경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미판매 의류를 폐기하는 패션업계의 관행을 금지하는 규제를 추진 중입니다.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열린 유럽이사회 경쟁력위원회* 회의에서 27개 EU 회원국은 ‘미판매 의류(직물) 폐기 금지 조항’을 에코디자인 규정(ESPR)에 포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ESPR은 제품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설계 단계에서부터 준수해야 하는 환경 및 에너지 효율에 관련된 요구사항을 명시한 규정입니다.

행정부 격인 EU 집행위는 회의에 앞서 유럽이사회에 “역내 패션업계가 미판매되거나 환불된 의류·액세서리 등을 파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긴 ESPR 초안을 제출한 바 있습니다. 이번 이사회에서 합의된 ESPR은 유럽의회 표결을 거쳐 올해 안으로 발효될 계획입니다.

그러나 해당 합의안을 놓고 EU 회원국 내에서도 갈등이 벌어지는 상황인 만큼 실제 발효까지는 다소 난항이 예상됩니다.

*경쟁력위원회(Competitiveness Council): 유럽이사회 산하 설치된 경쟁력위원회는 시장, 산업, 연구 및 혁신, 우주 등에 초점을 둔 정책을 다룬다. 해당 의제에 따라 27개 회원국 내 무역·경제·산업·과학 등을 담당하는 장관들이 모여 회의를 나눈다.

 

▲ EU 집행위는 대형 의류업체들에 폐기 재고량을 보고하는 의무만을 부과했으나 최근 재고품 폐기 행위 자체를 금지하기로 했다 ©Recover

“EU 전체 탄소배출량 중 20% 역내 의류폐기물에서 발생” 🚨

EU가 역내 의류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이유, 바로 의류산업이 음식·주거·수송 다음으로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EU 집행위는 ”역내 전체 탄소배출량의 20%가량이 의류산업 내 폐기물에서 나온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EU 집행위는 매년 역내 시민이 양산하는 의류폐기물이 약 600만 톤에 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의류폐기물 중 4분의 1만 재활용될 뿐, 대다수는 매립·소각된단 것.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온라인 쇼핑몰이 급성장하면서 쉽게 물건을 사고 버리는 양상이 커졌단 점에 EU 집행위는 우려를 표했는데요.

 

엎치락뒤치락 끝에 ESPR 강화안 합의돼…“패스트패션 시대는 끝났다” 🔚

연내 시행될 ESPR 규정(regulation) 개정안은 2009년 발표된 지침(directive)을 수정한 것입니다. EU 법률체계에서 규정은 지침보다 구속력을 갖고 있습니다. 국내법으로 수용 절차 없이 EU 회원국에 즉시 적용된단 것이 특징입니다.

연내 시행될 ESPR 규정 개정안은 제품의 ▲내구성 ▲재사용·재활용 가능성 ▲수리용이성 ▲환경발자국 등의 정보가 추가된 것이 핵심입니다. 또 이전과 달리 EU 역내 모든 제품이 적용 대상입니다.

당초 작년 3월 EU 집행위가 제안한 ESPR 초안에는 명품·패션 브랜드 대기업의 폐기량 보고 의무와 미판매·반품 직물의 폐기 금지가 포함됐습니다. 초안에는 ”패스트패션 시대는 끝났다“라는 문구가 포함됐습니다.

이후 유럽이사회에서 논의되는 과정에서 의장국인 스웨덴이 폐기 금지 조항을 삭제하며 논란이 됐는데요. 이번 합의를 통해 EU 집행위의 원안을 고수하기로 결정된 것.

EU 집행위의 원안에 따르면 EU 27개 회원국은 미판매 제품의 폐기를 방지하기 위해 규제(프레임워크)를 설정해야 합니다. 단, 직원 수가 249명 이하이고 연 매출이 5,000만 유로(약 710억 원) 미만인 중소기업에는 4년간 유예기간이 주어집니다. 소기업은 금지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와 함께 ESPR 규정을 준수했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품 내 ‘디지털 제품 여권(DPP)’을 추가하도록 하는 조항도 포함됐습니다.

 

▲ 유럽이사회 경쟁력위원회 의장을 맡은 에바 부쉬 스웨덴 에너지산업부 장관이 미판매 의류직물 폐기 금지 조항이 포함된 에코디자인 규정ESPR이 회의에서 가결됐음을 알리는 종을 울리고 있다 ©유럽이사회

프랑스vs이탈리아, 미판매 의류 폐기 두고 갈등 🥊

그렇다고 EU 모든 회원국이 미판매 의류 폐기 금지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판매 의류 폐기 금지를 주도한 국가는 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입니다. 특히, 프랑스는 미판매 의류·신발·화장품 등 재고품의 폐기를 금지하는 법을 2020년에 세계 최초로 제정한 바 있습니다. 그보다 앞선 2016년 미판매 식품 폐기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패스트패션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의류기업 H&M의 본국인 스웨덴과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등은 규제 강화에 반발해 왔습니다.

긴 논의 끝에 EU 경쟁력위원회는 미판매 의류 폐기 금지 프레임워크를 제정한다는 큰 틀에는 합의했습니다. 이사회 의장국을 맡은 스웨덴이 회원국 간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회원국 간 합의를 이끈 에바 부쉬 스웨덴 에너지산업부 장관은 본인의 소셜미디어(SNS)에서 “의류 소비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합의 과정에서 그는 “유럽에 지속가능한 제품을 출시하려면 제조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의류 및 장신구 폐기 금지 등 포함한) ESPR 규정 개정안은 역내 시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이 녹색전환으로 이행하는데 준비가 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EU 경쟁력위원회는 “(ESPR 규정 개정안) 발효 후 최소 18개월의 전환 기간을 제공해 여러 산업종사자가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ESPR은 유럽의회 표결 절차를 거쳐 올해 안으로 발효될 예정이나 회원국 간 견해 차가 드러나며 협상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APPLiA Europe 트위터

미판매 의류 폐기 금지에 가격 상승 우려도…“ESPR 가결, 쉽지 않을 것”🙅

앞서 언급한대로 미판매 의류 폐기 규제를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입니다.

이사회 내 규정 통과 직후, 아돌프 우르소 이탈리아 기업 및 제조부 장관은 “합의 과정에서 의류업계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가 완전히 반영되지 못했다”고 꼬집었습니다.

우르소 장관은 이어 “환경규제가 덜한 역외 국가에서 의류폐기물을 버리는 편법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U 정치전문매체 유랙티브(EURACTIV)에 의하면, 이탈리아 정부는 성명을 통해 “EU가 선도적으로 ESPR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불확실성도 존재한다”며 “대기업에 비해 대응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피해를 볼 것”이라 토로했습니다.

루마니아·불가리아·크로아티아를 포함한 일부 EU 회원국도 이탈리아의 우려에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미판매 의류 폐기 금지가 의류 가격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한 EU 외교관은 “의류가 폐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재활용과 가공을 거치면 소비자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EU의 순환경제 정책을 두고 회원국 간 견해차가 드러난 가운데, 오는 7월부터 EU 의장국을 맡게 될 스페인은 유럽의회 대표들과 ESPR 규정 개정안을 협상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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