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토끼의 이름은 랄프는 실험실로 출퇴근하는 ‘실험체’입니다. 랄프의 일상은 실험의 고통으로 점철돼 있지만,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착취가 그에겐 익숙한 듯 보이죠. 이는 단편 영화 ‘랄프를 구해줘(Save Ralph)’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는 개봉 직후 소셜미디어(SNS)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멕시코에서는 동물실험금지 청원 서명 130만 회 이상을 달성했습니다. 이를 신호탄 삼아 멕시코는 세계에서 41번째로 동물실험을 금지하는 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죠.

동물실험 금지를 이끄는 국제단체 휴메인 소사이어티(HSI)는 오는 2023년까지 전 세계 모든 화장품에서 동물실험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동물실험이 성행하는 이유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해 알아봅니다.

 

인간이 아닌 생명이라는 실험 도구 🐰

동물은 안전성을 실험하기 위해 다양한 영역에 동원됩니다. 의약품, 백신 개발과 비료, 살충제, 기타 화학물질, 피부에 직접 닿는 화장품까지. 특히, 화장품 업계에서의 동물실험은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는 악습인데요. 보통 독성 평가 변수를 확인하기 위해 동물실험을 필수로 요하기 때문에 쥐와 토끼 같은 설치류를 대상으로 안전성 검증을 진행했습니다.

동물 착취 실태가 공론화되자, 세계 각국은 동물실험 금지법을 제정하기 시작하는데요. 1998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화장품과 성분 안전성 실험에 있어 동물실험을 금지했으며, 2013년에는 유럽연합(EU) 전역에서 동물실험 중단을 선포했습니다.

또 미국의 7개 주는 동물실험을 진행한 화장품 판매를 금지했으며, 브라질의 10개 주에서도 금지법을 제정했죠.

동물실험 금지법은 단순히 국가적 생산 규제에 그치지 않고 해외에도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요. 수입되는 물품 역시 동물실험 금지 규정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 향수 제조를 위해 희생된 동물실험을 꼬집은 캠페인의 모습 ©NOAH Flickr

한국도 동물실험과 대체실험에 대해 많은 논의가 오갔지만, 화장품법이 개정되기까지 대략 20년 정도가 소요됐습니다. 2016년 화장품법이 개정되고, 2017년 3월부터는 과태료 부과제도를 시행하며 본격적으로 화장품 제조 및 생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동물실험이 금지됐죠.

그러나 법안이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실험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데요. 지난해 국내에서 실험에 동원된 동물의 수는 414만 1,433마리에 달합니다. 이는 법이 시행되기 전인 2016년과 비교해도 무려 43.8%가 증가한 수치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바로 느슨한 규제.

개정안에 의하면 동물 고통을 경감시킨 동물실험은 허용되고, 수출국에서 동물실험을 요구한다면 예외적으로 실험이 가능합니다. 국내에서 동물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동물보호법에 따라 ‘동물실험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합니다.

2019년 윤리위원회는 총 3만 9,244건의 동물실험을 심의했지만, 미승인으로 판정난 건은 고작 239건으로 미승인 비율이 0.6%에 불과하죠. 한국은 유럽연합(EU)과 달리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3R’ 원칙에 입각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어 불법성 여부를 확인하기 힘든 실정이죠.

 

©HSI

안전성 검증을 위해 동물이 필요할까? 🧪

동물실험 금지법의 기반인 기본 원칙 3R은 동물보호법 제23조에 명시된 내용으로 실험이 덜 고통스럽도록 개선(Refinement)하고, 실험에 사용되는 동물을 점차 감소(Reduction)시키며, 궁극적으로는 동물실험을 다른 실험으로 대체(Replacement)하자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동물실험의 대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새로운 성분을 포함하는 제품은 안전을 위해 엄격한 실험이 필요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검증한 실험으로는 배양 세포를 빛에 노출해 잠재적 광독성을 평가하는 광독성시험법, 인체 각막과 유사한 상피세포를 활용한 안자극시험법, 인체 유래 표피세포로 구성된 3차원 인체피부모델을 사용한 피부자극시험법 등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기술은 바로 피부자극시험법에 속하는 3D 바이오프린팅 기술입니다. 세포를 인간의 피부와 흡사한 구조로 성장하도록 유도 후 화학물질을 투여해 이상 반응이 없는지 확인하는 방법이죠. 실례로 프랑스 기업 로레알(L’Oreal)은 화장품 연구에서 동물실험을 금지한 이후 인간의 피부를 바이오프린팅하기 위해 미국 생명공학기술 업체 오가노보(Organovo)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 피부 부식성 실험 코로시텍스의 모습 ©HSI

또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험법인 피부 부식성 실험 코로시텍스(Corrositex)는 체외 시험관 연구 방법으로, 제품의 안전성을 결정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는데요. 병에 담긴 용액이 부식성 물질에 노출되면 착색이 이뤄지기에 빠르게 안전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4주 정도 소요되는 동물실험과 달리 코로시텍스는 최소 3분에서 길게는 4시간 이내 결과가 나타나죠.

이밖에도 인체 장기의 구조적·기능적 특징을 모방한 세포 배양 시험 장기칩(organs-on-chips), 시험관 내 줄기세포를 활용한 인공 장기 오르가노이드(organoid) 등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휴메인 소사이어티(HSI)는 비동물성 시험 방법과 정보 확산,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Animal-Free Safety Assessment Collaboration(AFSA)을 론칭, 글로벌 뷰티 기업들과 함께 협력하며 보다 강력한 정책 입안을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 단편 애니메이션 랄프를 구해줘의 한 장면 ©Save the Ralph 유튜브 캡처

아직도 동물이 실험대에 오르는 이유 🐁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물실험 금지법과 대안 기술 개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물을 동원한 실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물보호법에 입각한 촘촘한 규제를 보유한 EU도 마찬가지로 동물실험을 완벽히 배제하지 못했는데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EU 전역에서 1,090만 건이 넘는 동물실험이 수행됐으며, 2019년 한 해 동안 영국에서는 총 340만 건의 실험이 완료됐다고 합니다.

심지어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에는 영국과 유럽에서 판매되는 수백 개의 화장품에 동물실험을 거친 성분이 포함돼 있음이 밝혀졌죠.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가장 큰 이유는 동물실험 금지법과 상충되는 법안 때문인데요. 문제가 된 법안은 화학물질의 사용으로부터 건강과 환경을 높은 수준으로 보호하는 EU의 ‘화학물질 관리제도(REACH)’입니다.

독성 데이터와 노동자의 안전 평가에 대한 REACH 요구 사항을 준수하기 위해 동물실험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만일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등록자의 대체 실험 방법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동물실험을 권고하는 일도 발생한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EU는 REACH 법률 하에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화학약품과 관련된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회사들에게 비동물 실험 입증의 부담을 지우게 됩니다. 화학물질 규제에 따라 동물실험 대상이 될 수 있는 화장품 전용 성분은 약 100여 종에 이른다고 하는데요. 궁극적으로 화장품 성분에 대한 동물실험 금지 법안을 무색하게 만들었지요.

지난해 유럽화학청(ECHA)은 독일 화학 회사인 심라이즈(Symrise)가 두 가지 성분에 대해 동물실험을 수행해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으며, 지난 8월 영국 정부는 1998년 이후 처음으로 화장품 동물실험 금지를 재고하고 있습니다.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 화장품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 방식은 이미 발명되었습니다. 다만 법망이 촘촘하지 못하다는 점이 가장 큰 허들이 되고 있지요. 앞으로는 보다 강력한 규제, 동물대체시험법 개선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세계 곳곳에서 희생되고 있을 수많은 랄프를 위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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