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과학자가 기후변화 데이터로 만든 현악 4중주의 음악을 공개했습니다.
나가이 히로토 일본 릿쇼대학 지구환경과학과 교수와 연구진이 작곡한 ‘극지 에너지 예산(Polar Energy Budget)’이란 작품입니다.
과학자이면서 작곡가이기도 한 나가이 교수는 지난 30년간 인공위성이 수집한 극지방 데이터를 소리로 전환했습니다. 이후 두 대의 바이올린·비올라·첼로 등이 연주할 수 있는 음악으로 작곡했습니다.
이 음악은 기후변화가 지구의 에너지 균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음악은 지난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연되며 처음 공개됐습니다.
이후 관련 패널 토론과 연구 배경 등이 국제학술지 ‘아이사이언스(iScience)’에 지난 4월 19일(이하 현지시각) 공개되며 다시금 화제가 됐습니다.
나가이 교수는 “과학자만이 데이터를 사용하는 시대에서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데이터로 작품을 만드는 시대로 전환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습니다.

“복잡한 기후변화 메커니즘, 숫자에서 음악으로 표현하다” 🎶
나가이 교수가 기후변화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곡한 음악은 급박하고 불안한 심상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빠른 템포와 리듬 변화 외에도 스타카토와 피치카토 주법 등이 사용됐습니다. 스타카토란 음을 짧게 끊어 연주하는 것, 피치카토는 현을 손가락을 튕겨 음을 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나가이 교수는 이 음악이 ‘지구 에너지 균형(지구 복사평형)’과 관련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구에 입사하는 태양복사량과 지구에서 나가는 복사량 간의 균형을 말합니다. 지구 기후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이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작품의 제목도 위 개념에서 가져와 지구의 ‘에너지 예산(Polar Energy Budget)’으로 지었습니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인 지구 에너지 균형의 복잡한 메커니즘에 더 관심이 필요하단 것이 연구진의 문제의식입니다.
이를 대중한테 더 쉽고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빙하가 녹는 소리’ vs ‘빙하 붕괴 데이터’ 소리, 어떻게 다를까? 🤔
“극지의 에너지 교환에 대한 복잡한 메커니즘을 음악으로 만들어라.”
연구진의 과제를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나가이 교수는 세계 극지 4곳에서 30년간(1982~2022년) 수집된 데이터를 ‘음향화(sonification)’했습니다.
음향화란 디지털 데이터 등 소리가 아닌 것을 청각적 특성으로 변환하는 개념을 말합니다. 심장박동수·방사선 펄스 데이터를 소리로 변환해 주는 심박수 모니터와 방사선량계가 대표적입니다.
기존 현장의 소리를 채록해 음악으로 만든 것과는 다릅니다.
연구진은 ▲그린란드 북서부 빙상 ▲노르웨이 스발바르제도 인공위성 기지 ▲일본의 남극 쇼와기지 및 돔 후지기지 등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활용했습니다. 극지는 기후변화의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 영향이 더 잘 드러납니다.
각 지역의 단파 및 장파 복사, 강수량, 표면온도, 구름 두께에 대한 월별 측정값이 데이터로 사용됐습니다. 모두 지구 복사균형과 관련된 매개변수들입니다.
이후 연구진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음과 옥타브, 지속시간, 범위 등의 데이터로 변환됩니다.
그 결과, 기후변화 데이터를 기반으로 현악 4중주 악보가 탄생했습니다.
나가이 교수는 이를 통해 “지구 극지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이동을 기반으로 다양한 상상과 서사의 감각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단순 변환, 그 이상 필요해” 과학자→작곡가 변모한 까닭 🎼
과학 데이터를 소리로 변환하려는 시도는 앞서 여럿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이 의도적으로 추가됐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나가이 교수는 이를 ‘음악화(musification)’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최근 사람이 직접 들을 수 없었던 데이터나 정보의 음향화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과연 그것을 ‘음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태양 복사 데이터로 만든 멜로디를 듣는다고 곧장 타오르는 태양이 연상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연구진은 이런 자연의 데이터가 인간의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기 위해서는 작곡가의 개입이 필요할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실제로 이번 음악에는 음향화된 초안에 여러 편곡이 더해졌습니다.
데이터에 리듬을 입히고, 튀는 부분은 제거됐습니다. 또 데이터가 없는 부분에는 작곡이 도입됐습니다.

기후데이터 단순 재현에서 예술로…중요한 건 ‘인간적 손길’ 🙌
아이사이언스에 공개된 연구에는 작품 공개 후 이어진 패널토론과 관련된 내용도 담겼습니다.
해당 패널톤론은 작년 3월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토론에는 아마추어 예술 경력을 가진 지구과학자 전문가 및 학부생이 참여했습니다.
패널들은 해당 프로젝트에서 ‘예술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해당 연구에 참여한 참가자는 “기존의 음향화 작품은 확고한 예술적 위상을 확립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스니다. 그 이유로 음향화 이상의 표현적 깊이를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반면,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인간적이고 개성 넘치는 음악이 나와서 놀라웠고 흥미로웠다”고 그는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기후변화의 음향화에 나선 과학자가 아쉬움을 토로한 적도 있습니다.
캐나다 기후학자이자 보험사 WTW의 기후책임자인 스콧 세인트 조지의 사례입니다. 2013년 지구온난화 데이터를 음악으로 만든 연구진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기후변화에 관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며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재현성을 중요시하는 과학의 특성과도 연결됩니다. 연구에서는 개인의 개성을 배제하고 언제 어디서나 연구 결과가 재현 가능해야 합니다.
즉, 예술이 중요시하는 ‘인간적인 손길’은 배제되기 쉽다는 것.
나가이 교수 역시 “어느 정도 개입할지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기후줄무늬 다음은 ‘기후변화 음악’ 될까 🎧
연구진은 청중의 주의를 강력하게 사로잡는단 점에서 지구과학 내 음악의 잠재력이 높다고 강조합니다.
최근까지 지구과학계에서는 대중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그래픽 표현, 즉 시각화 시도들이 계속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온난화 줄무늬(Warming stripe)’입니다.
연구진은 시각화 방법론이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음악은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합니다. 음악을 통해 지구과학을 더 확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이 교수는 “예술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지구과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었다”며 음악은 예술이 과학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이번 작업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자 미개척 자원인 지구과학 데이터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싶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를 통해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지구과학 데이터를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시대를 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그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