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물과 습기는 가구의 적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최근 물에 적셔서 사용하는 가구가 공개돼 화제를 끌었습니다.
지난 16일(이하 현지시각)부터 일주일간 이탈리아에서 열린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언더프레셔솔루션(UPS)’ 컬렉션입니다.
이 컬렉션은 산업 디자이너 5명과 스위스 로잔예술대학교(ECAL)의 제품디자인 대학원생 15명이 2년간의 연구개발(R&D) 끝에 탄생했습니다.
공개된 가구는 16종입니다. 물에 적시면 몇 초만에 10배 이상 불어나 가구의 형태를 띤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생분해가 가능한 형상기억 소재가 사용됐습니다.
가구 산업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한 실험 연구 프로젝트란 것이 연구팀의 설명입니다.
어떻게 가구를 물에 적셔서 사용할 수 있단 걸까요?
가구의 첫 모습을 보면 이러한 의문은 더 커집니다. 모두 납작한 널빤지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언뜻 보면 ‘플랫팩 가구(Flat pack furniture)’처럼 보입니다.
플랫팩 가구란 가구 부품을 조립하지 않고 납작한 상태로 판매해 고객이 직접 조립하는 가구를 말합니다. 부피가 작고 충격에도 비교적 강해 배송이 용이하단 장점이 있습니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한 가구 기업이 그 유명한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입니다.
하지만 UPS 컬렉션은 기존 플랫팩 가구와 달리 조립도 필요 없습니다. 물에 적시면 부피가 빠르게 늘어나 가구의 모양을 띱니다. 건조 후에는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연구팀은 건조된 가구가 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기존 플라스틱폼 소재보다 내구성이 뛰어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가구 산업에서의 포장 최적화를 목적으로 2021년부터 기획이 시작됐습니다. 온라인 상거래가 증가한 상황에서 가구 산업 또한 운송으로 인한 환경영향을 줄일 필요가 있단 것.
이탈리아 건축가 겸 디자이너인 고(故) 가에타노 페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연구팀은 밝혔습니다.
1969년 공개된 대표작 ‘업5(UP5)’입니다. 폴리우레탄 소재와 진공포장 방식을 접목한 덕분에 의자를 10분의 1 부피로 운송이 가능합니다. 압축된 포장을 풀면 부풀어 올라 의자 모양이 갖춰집니다.
그러나 당시 업5에 사용된 소재인 폴리우레탄은 환경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폼 형태를 만드는 발포제에 강력한 온실가스인 염화불화탄소(CFCs), 일명 ‘프레온가스’가 사용됐다는 것입니다.
현재 CFCs는 1989년 발효된 ‘몬트리올 의정서’에 의해 사용이 금지됐습니다. 대체물질로 사용되는 수소불화탄소(HFC)도 퇴출되는 추세입니다.
연구팀은 업5의 아이디어는 살리되, 지속가능한 소재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코르크, 라텍스 등 기존 소재부터 피마자유 폴리우레탄폼이나 3D 방적 직물인 스페이서패브릭도 소재 중 하나로 탐구됐습니다. 나중에는 형상기억합금의 일종인 니티놀 등 최첨단 소재까지 확대됐습니다.
초기에 수집된 소재만 150가지에 달합니다.
약 2년간의 연구 끝에 최종적으로 선택된 소재는 셀룰로오스 스펀지였습니다. 목재 펄프로 제작돼 생분해가 가능하단 특징을 지닙니다.
다양한 크기와 색상, 성질로 가공이 가능하며 압축·톱질·드릴·3D재단 등 다양한 제조 공정에도 적합했는데요. 또 가장 접근성이 좋고 효율적인 재료였다고 연구팀은 설명했습니다.
이후 연구팀은 해당 소재를 다양한 모양으로 변형하며 가구 디자인에 착수합니다.
이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물에 젖은 스펀지는 부드러운 동시에 무거운 특성을 가집니다. 건조 과정에서 뒤틀어지거나, 약간의 힘만 가해도 변형될 수 있었던 것.
다양한 구조와 두께를 실험한 결과, 16가지의 가구와 소품 컬렉션이 탄생했습니다.
테이블과 의자, 선반에 전등갓과 장난감 등 용도도 다양합니다.
이 과정에서 연구팀은 소재의 단점이 장점이 될 수 있단 점도 발견했습니다. 해당 가구는 물을 흡수하면 다시 부드러워지는데요. 이를 활용해 찌그러진 부분을 수리할 수 있고,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디자인에 적극 반영한 컬렉션이 바로 대학원생 브라이스 템피어가 설계한 선반입니다.
운반 시에는 끝이 맞물린 곡선 형태를 띱니다. 설치할 때는 물에 적셔 원하는 모양으로 변형이 가능한데요. 선반을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경우, 다시 물에 적셔서 새로운 공간에 맞게 성형할 수도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번 컬렉션은 프로토타입(시제품)으로 산업 생산에는 적합하진 않은데요.
그럼에도 이번 컬렉션이 가구 배송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는 방법에 대한 로드맵을 제공할 것이라고 연구팀은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