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해 역내 친환경 산업에 보조금 등을 제공하는 ‘그린딜 산업계획(Green Deal Industrial Plan)’을 공개했습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이하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그린딜 산업계획 추진을 공식화한 뒤 불과 16일만에 나온 것입니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지난 1일(현지시각) ‘탄소중립 시대를 위한 그린딜 산업계획’을 담은 20장 분량의 통신문(Communication)을 발표했습니다.
통신문은 EU 집행위가 추진하려는 정책의 내용과 평가를 담은 일종의 의견서입니다. EU 이사회와 유럽의회는 통신문을 바탕으로 세부적인 논의를 진행합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주요 국가들은 탄소중립 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며 “우리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이 청정기술 혁명을 이끌어나가로 결심했다”고 피력했습니다.
이날 발표된 그린딜 산업계획의 핵심축은 다보스포럼에서 공개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일부 세부적인 내용이 추가된 것이 특징입니다.
그린딜 산업계획, “미국 IRA·중국 시장왜곡 대응…역내 친환경 산업 활성” ⚖️
그린딜 산업계획은 미국의 IRA에 맞서 EU 역내 친환경 산업 보호 및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EU 집행위는 또 해당 계획을 통해 해외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보조금을 지원하는 중국의 ‘시장 왜곡’에 대응한단 구상입니다.
통신문에는 “중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친환경 보조금 비율이 EU보다 2배 높다”며 “유럽과 파트너들은 이같은 불공정 보조금과 장기적인 시장 왜곡의 효과를 막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그린딜 산업계획은 크게 4개의 기둥, 즉 핵심과제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는 ▲예측가능하고 간소화된 환경규제 ▲신속한 자금조달 ▲친환경 기술 강화 ▲탄력적인 공급망 회복을 위한 개방무역 등입니다.
1️⃣ 탄소중립산업법핵심원자재법 입법: 친환경 산업 가속화·접근성↑ 📈
EU 집행위는 이미 입법이 예고된 ‘탄소중립산업법(Net-Zero Industry Act)’을 통해 친환경 산업 전환을 가속화한단 계획입니다. 탄소중립산업법에는 친환경 산업 관련 규제 완화, 신규 시설 신속 승인, 투자 확대 등의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더불어 기업이 EU 역내 재생에너지 시설 등 친환경 설비를 건설할 경우 허가 절차도 간소화됩니다.
또 다음달 8일께 ‘핵심광물원자재법(CRMA)’을 발표해 공급망 강화에 나섭니다. 전기자동차 등 친환경 산업에 필수적인 광물 원자재를 최대 30%까지 역내 채굴하는 것이 목표인데요. 이와 관련해 원자재 생산국과 소비국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핵심원자재 클럽’도 결성합니다.
앞서 다보스포럼에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친환경 기술 생산시설의 확장 및 산업 성장 속도에 도움을 주기 위해 탄소중립산업법과 핵심광물원자재법 제정은 필수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2️⃣ 친환경 산업 세액 공제 확대: 코로나19 회복기금 337조 우선 활용 💰
EU 집행위는 ‘전략적 탄소중립’ 분야에 대한 세액 공제 혜택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다만, 통신문에는 큰 틀의 정책 방향이 담겨 있는 만큼 구체적인 분야가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추후 협의 과정에서 구체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27개 EU 회원국 정부들이 재생에너지와 온실가스 감축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2025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관련 규정을 완화하겠다고 EU 집행위는 밝혔습니다. 국가간 보조금 지급 능력 차이를 고려해 회원국들이 기존 EU 기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입니다.
보조금 지급에 필요한 재원은 우선 8,000억 유로(약 1,077조원) 규모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중 남은 기금이 활용됩니다. 현재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에는 2,500억 유로(약 337조원)가 남아 있습니다. 이중 200억 유로(약 27조원)는 친환경 산업을 위한 보조금에 사용됩니다.
장기적으로는 인공지능(AI)·생명공학·청정기술 등의 핵심 기술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국부펀드(European Sovereignty Fund)’를 조성한단 것이 EU 집행위의 계획입니다. 이는 회원국 간 재정 불균형에 따른 친환경 산업 보조금 지원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EU 차원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세부 내용은 올여름 발표됩니다.
이밖에도 리파워EU(Repower EU) 기금 등을 활용하는 방안이 통신문에 담겼습니다.
다만, 지난달 EU 7개국(체코·덴마크·핀란드·오스트리아·아일랜드·에스토니아·슬로바키아)이 친환경 산업 보조금 지급을 위한 새로운 기금 조성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EU 집행위에 보낸 바 있습니다.
3️⃣ 친환경 산업 일자리 확대: 탄소중립산업 아카데미 설립 🧪
통신문에 따르면, EU 내 친환경 산업 일자리는 2000년에 320만 명이었습니다. 이는 2019년에 450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EU 집행위는 추후 이차전지(배터리)에서만 2025년까지 역내 80만 명의 추가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EU 집행위는 또 역내 일자리 중 35~40%가 녹색 전환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즉, 친환경 산업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기존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이 위협받는단 것입니다.
이에 EU 집행위는 ‘탄소중립산업 아카데미(Net-Zero Industry Academies)’를 설립해 전략산업별 고임금 기술인력을 배출한단 계획입니다. 해당 아카데미는 친환경 산업 내 기술인력 양성 및 노동자들의 기술 전환 교육을 담당할 예정입니다.
‘보조금’ 지급·규모 두고 27개 EU 회원국 간 입장 차 확인 🥊
그린딜 산업계획은 이달 9~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되는 EU 정상회의의 핵심의제로 논의됩니다.
그러나 보조금 확대를 두고 EU 회원국 간 입장 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보조금이 EU 회원국 중에서도 경제력이 큰 독일과 프랑스 등 소수 국가에 편중됐기 때문입니다.
가령 EU가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특별 편성한 보조금 총 6,720억 유로(약 904조원)의 절반이 넘는 3,560억 유로가 최대 경제국인 독일에 몰렸습니다. 또 24.1%는 프랑스가 가져갔습니다. 그린딜 산업계획의 보조금 지급에서도 이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단 지적이 계속 나옵니다.
당장 스웨덴과 네덜란드는 그린딜 산업계획이 회원국 간 보조금 확보 경쟁으로 이어져 EU 전체의 단합을 해칠 수 있단 점을 우려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신규 재원 마련에도 회원국 간 이견이 보입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과 네덜란드 등 보수적인 재정 정책을 펴는 회원국이 부채 발행 등 추가 차입에 매우 부정적”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유럽 내 물가상승률이 9%가 넘을뿐더러,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를 계속 올리겠다는 입장을 밝힌 점도 27개 EU 회원국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