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로 만든 구두, 포도 껍질로 만든 가방 등 식물의 섬유질을 기반으로 만든 가죽 제품이 유행한 지 오래입니다. 윤리적 소비와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됨에 따라 주요 패선업계들도 앞다퉈 식물성 가죽을 개발하는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데요.
식물성 소재와 함께 저렴한 가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가죽 소재가 있단 사실, 알고 계셨나요? 우리의 밥상에도 자주 올라오는 ‘물고기’가 주인공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비린내가 날 것 같은 물고기 가죽(Fish Leather). 우리의 편견과 달리 적절한 공정을 거치면 냄새가 전혀 없을뿐더러, 내구성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데요. 실제로 잉어, 메기, 연어 등 몇몇 어종은 오랜 옛날부터 가죽으로 사용됐습니다. 물론 전 세계 총 가죽 판매량 중 물고기 가죽이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인데요.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물고기 가죽이 어촌의 소득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FAO는 또 물고기 가죽의 소비 증가는 장기적으로 뱀이나 악어가죽의 수요를 줄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요. 물고기 가죽 수요 증가는 곧 멸종위기종을 보호할 수 있단 뜻이죠.
실제로 일본, 아이슬란드 등 해양국가들을 중심으로 물고기 가죽을 전문으로 만드는 기업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오늘 그리니엄에서는 물고기 가죽을 만드는 패션 스타트업들을 알아봅니다.
생선 껍질, 버리지 말고 ‘가죽’으로 만들면 어떨까? 🐠
일본 도야마현 서쪽 해안에는 온천으로 유명한 ‘히미’란 마을이 있습니다. 천연 수조란 별명이 붙은 마을 해안에는 물고기가 풍부한데요. 매년 겨울 따듯한 온천과 신선한 해산물을 즐기러 관광객들이 히미를 방문하죠.
관광객이 많을수록 마을에서 배출되는 음식물 쓰레기 양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마을 협동조합원이던 노구치 토모히사는 버려진 무수한 양의 생선뼈와 껍질을 보고 마음이 불편했는데요.
불편한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 토모히사가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물고기 가죽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미술학사를 전공한 토모히사는 여러 종류의 가죽을 공부한 바 있는데요.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물고기 껍질을 가죽으로 바꾸는 실험을 진행했죠.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토모히사는 물고기 가죽 개발에 성공합니다. 생선 껍질을 기부한 지역 주민들을 열렬한 반응을 보였는데요. 물고기 가죽의 잠재성을 본 그는 2018년 토토토(tototo)란 브랜드를 설립하죠.
토토토 물고기 가죽의 평균 제작 기간은 1개월. 제품 제작을 위한 봉제 작업까지 포함하면 약 2개월 정도 필요한데요. 물고기 가죽을 제작하기 위해선 크게 9가지 공정을 거쳐야 합니다.
먼저 토토토는 지역사회 생선가게에서 별도로 버려진 생선 껍질을 수거하는데요. 이후 껍질에 붙어 있는 살과 지방을 제거하는 작업을 거칩니다. 이 과정은 비린내를 없애기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요.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만큼 가장 고된 작업이죠.
이 작업이 완료된 껍질 위에는 소금을 뿌려 건조 보관하는데요. 이때 표백용액에 여러 차례 담구는 과정을 거쳐 껍질에 남은 지방과 색을 서서히 제거합니다. 약 2주일간 15차례 정도 반복하면 비린내 자체는 거의 사라지는데요.
토토토는 이후 녹차 등 식물에서 추출한 탄닌*액에 껍질을 2주간 담가 튼튼하고 유연한 가죽을 만들죠. 마지막으로 파란색이나 주황색 등 염색 작업을 거치면 형형색색의 물고기 가죽 완성!
*탄닌: 가죽 무두질에 사용되는 탄닌은 대개 나무에서 추출되는데, 단백질을 분해하는 특징이 있다. 탄닌 무두질을 거친 가죽의 기본 색상은 옅은 갈색을 띄게된다.
완성된 물고기 가죽은 제품별로 적절한 두께와 크기로 가공되는데요. 물고기가 살아있을 적 생신 상처나 비늘 모양 등이 제각기 다른 탓에 제품별로 특색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현재 토토토가 가죽 제작을 위해 사용하는 어종은 도미, 방어, 농어 등으로 이뤄져 있는데요.
노구치 토모히사 토토토 설립자 겸 대표는 “생선뼈나 껍질 등 어업 부산물의 약 90%는 재사용되지 않고 버려진다”며 “물고기 가죽은 기존과 달리 멸종위기종을 죽이지 않고 부산물을 이용해 만든단 점에서 지속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고급 브랜드들이 즐겨찾는 물고기 가죽 🐠
토토토는 물고기 가죽을 사용한 일본 최초의 브랜드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물고기 가죽을 활용하고 있을까요? 답은 ‘그렇다’입니다.
북극 인근 지방에 거주하는 이누이트를 비롯해 일본 북부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등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일찍이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신발과 옷 등을 입었는데요. 북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아이슬란드도 메기와 연어 껍질을 활용한 가죽 공예 전통을 가지고 있죠.
아이슬란드 북부에 있는 제혁소, 노르딕 피쉬 리더(Nordic Fish Leather)는 1994년부터 물고기 가죽을 생산했습니다. 이 기업의 과거 사명은 아틀란틱 리더(Atlantic Leather)인데요. 크게 농어, 대구, 연어, 늑대장어 등 4개 어종의 껍질을 가죽 생산에 활용했죠.
주문량이 많던 2019년에는 매월 1만 개 이상의 물고기 가죽을 생산했는데요. 가죽 생산 방식 자체는 일본 토토토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가죽 생산에 필요한 주요 전력이 수력 및 지열 등 재생에너지로 생산해 온실가스를 줄인 것도 특징입니다.
또 연어 및 대구의 경우 각각 MSC 및 ASC 인증을 받았는데요. 이 인증은 지속가능한 어업으로 생산하는 경우에만 부여되는 국제 인증으로 잘 알려졌죠.
노르딕 피쉬 리더에서 생산한 물고기 가죽은 유럽 전역으로 수출됩니다. 지미추(Jimmy Choo), 디오르(Dior) 등 주로 고급 의류와 신발, 핸드백 을 만드는 명품 브랜드들이 물고기 가죽을 찾는데요. 실제로 노르딕 피쉬 리더에서 개발한 물고기 가죽은 파리패션위크 등 유명 패션위크에 소개된 바 있죠.
프랑스, 영국, 캐나다,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도 물고기 가죽 생산을 위한 스타트업이 잇따라 설립되는 중인데요. 최근에는 베트남이나 케냐 등을 중심으로 어촌 주민 소득 증대 차원에서 물고기 가죽 사업에 뛰어든 경우가 많습니다.
케냐 빅토리아호 기슭에 있는 키수무란 도시에는 알리삼(Alisam)이란 기업이 있는데요. 2010년경 설립된 이 기업은 호숫가 근처 통조림 공장에서 버린 생선 껍질을 수거해 가죽을 만들고 있죠. 카사바 등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식물에서 무두질액을 추출하고, 히비스커스꽃에서 추출한 염료로 염색한 것이 특징인데요.
호숫가에서 버려지던 어업 부산물에 새로운 가치를 더한 것을 넘어 신규 일자리 창출을 통해 지역사회 경제 성장에도 이바지한 기업으로 소문났죠. 이 기업은 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덴마크 등으로 물고기 가죽을 수출 중인데요.
FAO는 물고기 가죽 등을 활용한 블루 패션(Blue Fashion)이 의류산업을 보다 지속가능하게 할뿐더러, 개도국 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