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참여와 협업이 요구된다. (순환경제는) 자원순환 정책과 다르다. 이전까지 폐기물 사후관리 측면에서 접근했고, 끝내 한계에 봉착했다. 결국 제품의 전 생애주기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8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탄소중립과 순환경제 세미나’에 참석한 조지혜 한국환경연구원(KEI) 자원순환연구실장이 남긴 말입니다. 이날 세미나는 2023 스마트제조혁신포럼 부대행사로 열렸습니다.

조 실장은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발전부문 전환과 함께 제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속가능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주요 방안 중 하나로 순환경제가 떠올랐다고 조 실장은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산업계에서도 ▲폐기물 원천 감량을 위한 제품 설계 ▲공정 내 순환자원 이용 ▲순환형 산업단지 조성 등 생산 단계에서부터 순환경제의 개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 실장은 “(순환경제 원칙이 적용된 설계를 통해) 제품의 자원 소비를 줄이고, 가치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며 “탄소중립 측면에서도 에너지 절감에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주요국 신성장동력으로 떠오른 ‘순환경제’…“EU가 주도하는 중” 🌐

유럽연합(EU), 미국, 일본 등 주요국에서는 신성장동력으로 순환경제에 주목하고 있단 것이 조 실장의 설명입니다.

현재 세계 순환경제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곳은 단연 EU입니다. EU의 경우 2020년 ‘신(新) 순환경제활동계획(CEAP)’를 발표했습니다. 온실가스 감축에 초점을 둔 4개 분야에 순환경제가 포함됐습니다.

또 지난해 3월 EU 집행위원회는 지속가능한 제품 생산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 개정안(ESRP)도 내놓았습니다.

올해 시행될 전망인 에코디자인 규정 개정안은 기존 지침에 제품의 ▲내구성 ▲재사용·재활용 가능성 ▲수리용이성 ▲환경발자국 등의 정보가 추가된 것이 핵심입니다. 또 이전과 달리 EU 역내 모든 제품이 적용 대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순환경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2020년 12월부터입니다. 당시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의 10대 과제 중 하나로 ‘순환경제 활성화’가 제시됐습니다. 이듬해 12월 ‘한국형(K)-순환경제 이행계획’이 발표됐고, 작년 12월에는 ‘순환경제 사회 전환 촉진법’ 국회를 통과한 상황입니다.

 

▲ 지난 8일 탄소중립과 순환경제 세미나에 참석한 조지혜 한국환경연구원KEI 자원순환연구실장이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순환경제 중심 정책과제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greenium

“순환경제 전환? 이행 진단 위한 데이터 관리체계·평가지표 구축 필요!” ⚖️

조 실장은 순환경제 전환으로의 주체는 기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 실장은 “정부는 이들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며 “개별 기업으로의 접근보다는 사회 시스템적으로 확산돼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이를 위해선 시장 기반의 인센티브 지급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국내 순환경제 정책 추진방향에 대한 제언도 나왔습니다. 조 실장은 크게 ▲자원 전주기 탄소발자국의 획기적 감축 ▲순환경제 혁신산업 경쟁력 확보 ▲관련 생태계 구축 등이 추진돼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 정책이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선 정량적 수치, 즉 데이터의 파악이 필요하다고 조 실장은 역설했습니다. 그는 “재생원료가 (제품 생산 공정에) 사용될 경우 파급효과에 대한 정략적 수치와 데이터 기반의 효과 분석이 필요하다”며 “재생원료가 산업에 얼마나 재투입되는지 업종별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평가지표의 필요성도 언급했습니다

이 때문에 개별로 분산된 통계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조 실장은 덧붙였습니다.

 

▲ 유럽연합EU이 2022년 3월에 발표한 에코디자인 규정 개정안에는 모든 물리적 제품에 디지털 제품 여권DPP을 적용하도록 하는 내용이 명시됐다 DPP는 이르면 올해 안에 시행된다 ©greenium

순환경제 게임체인저 될 ‘디지털 제품 여권’…“선제 진단·해법 모색 필요” 🤔

EU의 ‘디지털 제품 여권(DPP)’ 추진에 맞서 국내 산업계가 선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디지털 제품 여권은 전자제품·섬유·가구 등 모든 제품의 정보를 디지털화한 것입니다. 제품별로 여권과 유사한 번호가 부여됩니다. 소비자는 제품에 부착된 QR코드 등 전자 표식을 통해 ▲제품·부품 출처 ▲재활용 가능성 ▲수리 용이성 ▲탄소발자국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에코디자인 규정 개정안에 따라 EU 역내에서 거래되는 모든 제품에는 디지털 제품 여권이 부여됩니다. EU는 이를 통해 공급망 및 제품 생애주기를 추적 관리할 계획입니다.

문제는 디지털 제품 여권 도입으로 인해 국내 기업의 부담이 커졌단 것. 실제로 한국무역협회가 EU 주요 환경규제 정책을 파급력·시급성·대응난이도를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 디지털 제품 여권이 포함된 에코디자인 규정 개정안이 우리 기업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 탄소중립과 순환경제 세미나에 참석한 박한구 스마트제조혁신추진단 전前 단장이 디지털 제품 여권DPP과 배터리 여권 대응 전략을 주제로 발표하는 모습 ©greenium

박한구 스마트제조혁신추진단 전(前)단장은 “우리의 방식으로 이끌어나갈 필요가 있다”며 “(디지털 제품 여권을) 어떻게 만들어 표준업계에 맞출 것인지 고민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박 전 단장은 디지털 제품 여권이 순환경제 전환에 있어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는 디지털 제품 여권이 수명이 다한 제품의 재활용·재사용 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을뿐더러, 제품 탄소배출량·폐기물 발생량 등 각종 정보를 집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디지털 제품 여권 구현을 위해서는 “정보의 신뢰성을 보장하고, (제품 내) 민감한 정보의 경우 기밀성이 유지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 100여개 기업 및 기관이 참여 중인 글로벌 배터리 얼라이언스GBA는 올해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배터리 모든 생애주기 정보를 담은 배터리 여권 시제품을 처음 선보였다 국내 배터리 기업 가운데는 LG에너지솔루션에 배터리 여권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GBA

EU 배터리 여권 2026년부터 시행 예정…한국은? 🔋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에 대한 대응이 더 가속화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디지털 제품 여권보다 앞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배터리 여권입니다. 이 제도에 따르면 배터리에는 ▲재료 원산지 ▲탄소배출량 ▲재활용 원료 사용 비율 ▲내구성 ▲용도 변경 및 재활용 이력 등의 정보가 기록되야 합니다. 용량 2kWh(킬로와트시) 이상인 모든 산업용·자동차용 배터리에 적용되는데요. 배터리 여권은 2026년부터 EU 27개 회원국에서 시행됩니다.

외국 기업들도 배터리 수출을 위해서는 EU 환경규제에 부합하는 배터리 여권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에 세계 각국은 EU 배터리 여권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웃나라 중국의 경우 2018년 발효된 ‘신에너지차 배터리 재활용 관리 잠정방법’에 의거해 전기자동차 배터리 관련 정보를 수집·관리하는 추적 플랫폼 ‘EVMAM-TBRAT’을 운영 중입니다.

일본의 경우 작년 4월 민간 주도의 배터리공급망협의회(BASC)의 제안으로 EU 배터리 여권과의 호환성 및 확장성을 살린 ‘일본식 배터리 공급망 디지털 플랫폼’을 설계·제안했습니다.

또 세계 100여개 기업 및 기관은 배터리 여권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글로벌 배터리 얼라이언스(GBA)’를 출범한 상황입니다. GBA는 올해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에서 배터리 디지털 여권 시제품을 공개했습니다.

 

▲ 지난해 11월 1일 서울 반포동 JW메리어트호텔에서 이차전지 산업전략 원탁회의가 개최됐다 이날 민관협력체인 배터리 얼라이언스 출범식도 열렸다 ©산업통상자원부

우리나라는 지난해 11월 민관협력체인 ‘배터리 얼라이언스’를 출범하고, 배터리 여권 제도 법제화에 검토에 나섰습니다. 한국전지산업협회가 올해 1월 법제화를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는데요. 얼라이언스에 포함된 기관들과 사전 협의가 없었던 터라 법제화 시작단계에서부터 불협화음이 일어났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이에 박 전 단장은 “(배터리 여권에) 필요성을 잘 못 느끼는 기업들도 있다”며 “(업계 간) 워킹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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