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산업디자이너이자 20세기 산업디자인의 아이콘, 필립 스탁.

그는 “부자를 위해 2억 달러(약 2,600억원)짜리 요트도 디자인하지만, 가난한 사람도 살 수 있는 2달러(약 2,600원)짜리 우유병도 디자인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디자인을 선보여왔습니다.

동시에 스탁은 인간과 환경에 해로운 생산방식을 채택한 기업과 투자자를 비판하고,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에 힘써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신발폐기물을 없앨 수 있는 운동화 설계에 참여했습니다. 2021년 설립된 미국 캘리포니아의 패션 스타트업 발리스톤(Baliston)과 협업해 제작한 스니커즈입니다.

스탁은 “이 신발이 5개월, 1년이 아니라 평생을 위한 신발”이라고 자신했는데요. 대체 어떤 신발일까요?

 

▲ 발리스톤의 운동화에는 착용자의 걸음걸이 등 데이터를 수집하는 센서가 장착돼 있다 발리스톤은 수집된 데이터를 통해 신발 밑창쿠션의 마모 정도를 추정하고 그에 맞춰 재활용 시기를 알려준다 ©Baliston 유튜브 캡처

‘스마트 재활용’ 신발 선보인 발리스톤…“재활용 시기 자동 측정해!” ♻️

패션 스타트업 발리스톤은 지난 11일(현지시각) 자동으로 재활용 시기를 알려주는 운동화를 공개했습니다. 운동화 내 장착된 센서를 통해 가능한데요.

운동화를 신으면 센서가 착용자의 걸음을 추적합니다. 몇 주간 데이터를 수집한 뒤, 발리스톤은 인공지능(AI)을 사용해 착용자의 걷는 방식을 분석합니다. 그 다음, 착용자의 걸음걸이 개선에 도움이 되는 맞춤 깔창이 우편으로 배송됩니다.

동시에 발리스톤은 센서에서 수집한 데이터로 신발 밑창(쿠션)의 마모 정도를 추정합니다. 밑창이 20% 미만까지 마모되면 센서와 연동된 애플리케이션(앱)이 자동으로 교체 시기가 됐음을 알려줍니다.

이후 착용자가 해당 운동화를 택배로 발리스톤에 보냅니다. 발리스톤은 해당 신발을 소재별로 분리해 모두 재활용합니다.

발리스톤은 이 운동화를 일반 매장에서 판매하는 대신, 구독형 서비스로 출시했습니다. 이는 생산자가 판매·수거·재활용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고객은 운동화 한 켤레를 구입하는 대신, 연간 249.99달러(약 33만 2,500원)의 구독료를 지급합니다. 그 대가로 운동화가 닳을 때마다 새 운동화로 교환 받을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낡은 운동화는 재활용하고, 센서는 새 운동화에 장착해 재사용됩니다.

 

▲ 발리스톤이 개발한 센서 이처럼 사용자의 신체에 부착하거나 착용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장치를 웨어러블 기기라고 부른다 ©Baliston 홈페이지 갈무리

운동·헬스케어 국한되던 웨어러블 기기, “지속가능성도 높일 수 있어!” 🏃

발리스톤의 운동화처럼, 신체에 부착하거나 착용해 개인의 신체 변화를 지속적으로 수집하는 장치를 ‘웨어러블 기기(Wearable Device)’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몸에 착용해 이용자의 신체 상태를 확인하는 제품을 말합니다. 주로 건강관리 목적으로 헬스케어 산업에서 각광받고 있습니다.

발리스톤이 개발한 센서 또한 의학계에서는 이미 맞춤형 깔창 등으로 사용 중인 기술입니다. 센서 모듈은 걷기 품질 점수, 추진력, 뒤꿈치 충격력, 보행 대칭성, 보폭 등의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발리스톤은 이를 기반으로 착용자의 자세와 걸음걸이 개선은 물론 운동방법 제안 등 건강 정보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발리스톤이 이 기술을 개인의 건강 관리를 넘어 제품의 순환성 향상에 접목했단 것입니다. 이는 “제조업체가 자신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발리스톤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고객이 신발을 쉽게 반품함으로써 재활용률을 높이고자, 웨어러블 기기 및 데이터에 기반한 구독 서비스를 선택했다고 회사 측은 밝혔습니다.

 

순환성 높인 운동화 디자인…“20세기 아이콘에게도 어려웠다고?” 😅

발리스톤은 웨어러블 기기에 맞는 인공지능(AI) 개발에 8년이 걸렸습니다. 신발 전체를 재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큰 도전이었습니다.

애초에 신발은 재활용이 어려운 제품 중 하나입니다. 고무, 가죽, 플라스틱 등 여러 소재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전 세계 신발폐기물의 95% 이상이 재활용되지 않고 매립되거나 소각되는 현실입니다.

발리스톤은 쉽게 재활용할 수 있는 신발을 설계하기 위해 유명 산업디자이너인 스탁과 손을 잡았습니다. 정작 스탁은 자신이 그간 신발 디자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신발은 유행에 민감한 제품입니다. 일반인 상당수가 신발을 최소 1년에 한 번 이상 바꾸기 때문에 많은 양의 폐기물이 발생합니다. 인간과 환경을 철학으로 내세웠던 그에게 금세 폐기물이 되는 신발은 매력적인 제품이 아니었던 것.

 

▲ 스탁은 재활용 용이성을 높이기 위해 5가지의 바이오 기반 소재만을 사용해 운동화를 디자인했다 ©Baliston

그럼에도 순환디자인을 통해 신발의 수명을 늘리겠다는 발리스톤의 취지에 공감해 협업에 나섰다고 스탁은 밝혔습니다.

신발의 순환성을 높이기 위해 스탁은 신발 부품의 가짓수를 줄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일반 신발에 최소 40개의 부품이 사용되는 것과 달리, 5가지 부품만 사용한 것.

스탁은 “(재활용 용이성이라는) 엄격한 요구사항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며 디자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그간 자신이 일종의 ‘다이내믹 디자인 디렉터’로써 역동적인 작업을 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작업에서는 많은 부분을 자제해야 했다는데요. 때로는 재미없었으나,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작업이었다고 스탁은 덧붙였습니다.

3년간의 설계 끝에 ▲센서 ▲맞춤형 깔창 ▲신발의 윗창 ▲밑창 ▲미끄럼 방지 고무로만 이뤄진 디자인이 완성됐습니다. 덕분에 신발은 분해가 쉬워졌고, 발리스톤은 전체 반품 및 재활용 과정도 단순화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센서를 제외한 모든 부품들은 100% 재활용 가능한 바이오소재가 사용됐습니다. 여러해살이풀인 ‘아주까리’에서 추출한 섬유, 유기농 면, 천연고무와 사탕수수 유래 바이오플라스틱인 사탕수수 EVA 등이 원료입니다.

센서를 충전하는 충전기 및 센서케이스도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 유명 산업디자이너인 필립 스탁이 발리스톤과 함께 설계한 스마트 재활용 신발을 들고 있는 모습 ©Baliston

필립 스탁, “우리는 신발을 판매하지 않는다” 말한 이유 👟

운동화를 이렇게까지 복잡하고 어렵게 신어야 하는가, 혹은 운동화 하나에 센서와 AI까지 사용돼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에 카림 옴니아 발리스톤 최고경영자(CEO)는 기후변화와 폐기물 문제 등 인류가 맞닥뜨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발의 새로운 시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신발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판매해야 한다는 것이 옴니아 CEO의 설명입니다.

그는 “우리는 소비를 강요하지 않는다”며 신발이 충분히 좋고, 아프지 않다면 계속 신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판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는 신발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스탁의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스탁은 이번 프로젝트가 “웰빙에 관한 프로젝트”라 소개했습니다. 그는 “(발리스톤은) 생태·재활용·유기농·편안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자인을 통한 ‘웰빙’을 판매하는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 2022년 6월 스위스 스포츠웨어 브랜드 온On이 처음으로 순환형 운동화 구독 서비스 사이클온CyclOn을 출시했다 ©On 유튜브 썸네일

2022년 이어 두 번째 ‘신발 구독 서비스’…순환패션 새바람 될까? 🤔

사실 순환형 운동화 구독 서비스를 내놓은 패션 브랜드는 발리스톤이 처음이 아닙니다.

작년 6월, 스위스 스포츠웨어 브랜드 온(On)은 신발 대 신발 재활용이 가능한 운동화 ‘클라우드네오(Cloudneo)’를 연간 구독하는 서비스인 사이클온(CyclOn)을 출시했습니다.

발리스톤은 그로부터 약 1년 뒤 출시된 것. 구독 서비스에 웨어러블 기기를 추가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신발 구독 서비스에 대한 수요나 시장의 반응은 크지 않습니다. 운동화 구독 서비스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른 시점입니다.

그러나 ‘순환신발’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 중의 하나로 구독 모델에 대한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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