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가면 어딜가나 반드시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여권. 예로부터 여권은 국경을 넘는 순간 한 개인의 정보를 증명해줬는데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사람이 아닌 전자제품을 대상으로 여권 발급을 추진 중인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른바 ‘디지털 제품 여권(DPP, Digital Product Passport)’이란 제도인데요. 현재 정책 초안 작성 중에 있고, 이르면 2022년 상반기에 초안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디지털 제품 여권이 뭐야? 🤔

EU 집행위가 추진 중인 디지털 제품 여권. 스마트폰, 텔레비전, 라디오, 냉장고, 청소기 등 유럽 내 판매되는 모든 전자제품에 발급될 예정인데요. 디지털 제품 여권에는 해당 전자제품의 부품 원산지와 구성, 수리 및 해체 가능 여부, 수명 정보 등이 종합적으로 담긴다고 합니다.

EU 집행위는 제품 정보를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알려 제품의 재사용·재활용률은 높이고, 소비자 자가수리권(Right to Repair)도 보호한단 계획인데요. 아직은 생소한 디지털 제품 여권은 2020년 EU가 발표한 신순환경제실행계획(New Circular Economy Action Plan)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신순환경제실행계획은 제품을 수리하거나 재사용하는 등, 사용한 자원이 가능한 오랫동안 EU경제에 남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요.

당시 EU 집행위는 지속가능한 소비 확산을 위해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전자제품 정보를 제공하는 디지털 제품 여권 도입을 고려한다고 밝혔습니다.

 

© Generation Climate Europe 홈페이지 갈무리

특히, EU 집행위는 2019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세계 자원 전망(Global Resource Outlook)’ 보고서를 근거로 디지털 제품 여권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해당 보고서는 현재 세계 온실가스 전체 배출량의 절반과 생물다양성 손실과 물 스트레스 지수의 90% 이상이 자원 추출과 가공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향후 40년 동안 지구촌 물질 소비량이 2배 이상 증가해 2050년까지 연간 폐기물 발생량도 7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죠.

EU 집행위는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통해 자원소비량을 낮춰야 한단 점을 역설했는데요. 디지털 제품 여권이 도입되면 순환경제 전환이 더 가속화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신순환경제실행계획 발표 후 유럽의회도 결의안을 통해 디지털 제품 여권 도입을 환영한단 뜻을 밝혔는데요. 윌리엄 닐 EU 집행위 순환경제 고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장에 출시되는 제품들은 내구성과 수리성을 모두 갖추도록 설계돼야 한다”며 디지털 제품 여권을 통해 제품의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을 예방할 수 있단 점을 강조했습니다.

 

© 글로벌 의류 브랜드 판가이아에서 시행 중인 디지털 여권 Pangaia 제공

그래서 어떤 내용이 담겨? 🛂

현재 EU 집행위는 디지털 제품 여권에 포함될 제품군과 구체적인 정보 등을 논의 중입니다. 디지털 제품 여권의 경우 시중에서 이미 사용 중인 기술이 적용돼 구현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데요. 실례로 글로벌 의류 브랜드 판가이아(Pangaia)나 노발리스(Novalis) 같은 건축자재업체 등은 자사만의 디지털 제품 여권을 제작해 활용 중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들 업체는 소재 원천과 유통 그리고 환경에 미친 영향을 QR코드에 담아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라 디지털 제품 여권이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EU 집행위는 디지털 제품 구현을 위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블록체인 등 여러 기술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밝힌 상황입니다.

문제는 브랜드별로 종류가 다양한 전자제품의 데이터를 총 정리해야 한단 것인데요. 원료 공급업체, 브랜드, 재활용업체, 소비자에게 전달될 최신 정보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해야 할뿐더러, 모든 이해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단 점이 가장 큰 숙제라고 합니다.

 

© TCO Ceritifed 홈페이지 갈무리

공급자와 소비자가 진정으로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선별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요. 한 제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품의 공급망을 조사해야 하고, 원료·생산·유통·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제품의 수리나 반환, 재활용 혹은 재사용이 가능한지도 평가해야 하죠. 만약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정보 유출이나 지식재산권 침해 등의 문제를 어떻게 방지할지 놓고 이야기하는 중인데요.

이런 우려에 대해 윌리엄 닐 EU 집행위 순환경제 고문은 디지털 제품 여권은 전체 공급망에서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줄일 수 있을뿐더러, 데이터 암호화 등의 방식을 통해 개인정보 유출 및 지식재산권 침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현재 업계와 지식재산권 침해 문제를 중점으로 논의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독일 기계공학산업협회(VDMA)의 칼 하우스겐 회장은 디지털 제품 여권 제작에 앞서 대량생산 되어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은 소비재와 기계장비 등 제품 수명주기의 차이를 염두할 것을 촉구했는데요.

하우스겐 회장은 이어 “섬유의 경우 소재가 한정된 덕에 각각의 데이터 수집이 쉬우나, 휴대폰이나 헤어드라이어 같은 제품들은 복잡하다”며 EU 집행위에게 정책 초안 작성에 있어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데이터 구축 및 관리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중소기업의 부담이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덧붙였죠.

 

+ 배터리 여권도 도입된단 것 🔋
EU는 2026년 1월 1일부터 유럽 내 시장에서 유통되는 배터리는 각각의 제품 정보 및 처리·재활용 정보를 담은 고유전자기록이 부여될 계획인데요. 디지털 제품 여권에 포함되긴 하나, 이를 분류해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으로 부르는 상황. 세계 70여개 기관이 모여 설립한 ‘글로벌 배터리 연합(GBA’)도 배터리 여권을 도입해 폐배터리의 수거와 재활용을 수월하게 만들 계획인데요. EU도 유럽 단일 시장 내 배터리 여권을 통해 배터리를 구성하는 셀(Cell)의 원료인 코발트와 리튬 원산지를 추적하는 등 공급망 투명성을 높일 예정입니다.

 

© Calvin Hanson Unsplash

혹시 모르니 우리 기업도 대비 필요해 🔌

앞서 디지털 제품 여권 정책 초안은 2022년 상반기에 공개된다고 했는데요. 정책 초안 및 및 관련 결의안 등은 디지털 제품 여권의 점진적 배치를 위한 토대를 준비하는 과정이며, 오는 2023년부터 활용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일반 전자제품, 배터리 및 기타 중점 분야에 맞춰 크게 3가지 종류의 디지털 제품 여권이 제작되는데요.

기타 중점 분야는 EU 신순환경제실행계획(CEAP)이 목표로 하는 섬유·가구·철강·시멘트·화학 등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디지털 제품 여권이 전자제품을 넘어 의류나 가구 등 모든 제품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내비친 것인데요. 이를 위한 전반적인 로드맵도 같이 구상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물론 모든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제도 자체가 달라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EU 집행위는 디지털 제품 여권이 유럽 단일 시장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요. 관세청에 의하면,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주방가전 최대 수출 비중에서 북미 다음으로 유럽 지역이 높았는데요. 우리 기업들도 EU의 디지털 제품 여권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