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산업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GHG)의 1.4%가량 차지하고 있습니다. 매년 수백억 켤레의 신발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해외 통계 사이트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2020년에 생산된 신발은 205억 켤레. 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의 영향으로 생산이 줄어든 것인데요.

2015년부터 코로나19 유행 직전인 2019년까지, 5년간 생산된 신발 평균 수는 236억 켤레로 조사됩니다.

신발이 재활용되는 비율은 단 5%에 불과합니다. 고무, 플라스틱, 가죽, 직물 등 여러 소재가 섞여 있을뿐더러, 분리도 어렵기 때문인데요. 이는 달리 말하면 신발의 95%는 일반쓰레기와 함께 소각 혹은 매립되고 있단 뜻입니다.

이에 상당수 신발 브랜드들이 부품별로 분리가 더 쉬운 디자인을 고심하고 있는 상황. 만약 분리 자체가 필요 없는 신발이 있다면 어떨까요?

 

© 완성된 운동화왼와 몰드에서 떼어낸 상의를 다듬고 있는 마리아 인처 오랑 디자이너 Simplifyber

바느질 필요 없는 운동화, 틀에 찍어 만들어! 👟

신발을 만드는 과정은 10여 가지가 넘습니다. 실을 자아 천으로 직조하거나 동물 가죽을 다듬는 것부터 시작해서 염색, 재단, 조립, 재봉을 거치면서 수많은 재료가 더해지는데요. 생산 과정에서 여러 생산폐기물이 발생하는 건 물론이고, 이 복합소재 구성 탓에 재활용도 어려워집니다.

이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들 순 없을까요? 미국 패션 스타트업 심플리파이버(Simplifyber)의 공동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마리아-인처 오랑3D 프린팅에 주목했습니다.

재료를 층층 쌓아 올리는 3D 프린팅. 부품의 분리 및 해체가 용이해 지속가능성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주목받는데요.

오랑 CEO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플라스틱이 아닌 식물 섬유를 원료로 신발을 제작했습니다.

 

© Simplifyber

심플리파이버의 신발은 특별합니다. 우선 디자이너가 스케치나 3D 파일로 신발을 설계합니다. 이후 디자인에 따라 특수 설계된 몰드(틀)을 만들죠. 그 다음 재활용 의류나 농업 폐기물에서 기반한 식물 기반 재료, 무독성 첨가제를 혼합해 셀룰로오스 용액을 만듭니다.

무독성 첨가제 또한 음식물 쓰레기나 소금 등에서 추출해 생산하는데요. 액체 상태의 용액에 염료를 섞어 색을 냅니다. 이 용액을 틀에 붓고 건조하면 끝.

완성된 운동화 갑피(Upper)에서는 면과 같은 부드러운 질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식물성 섬유 조합을 사용한 덕인데요. 식물성 섬유라 종이처럼 물에 잘 젖고 찢어질까 걱정할 수 있지만, 물에 젖어도 말랐을 때 강도가 원 강도의 94%에 가깝다는데요.

 

© Simplifyber

회사 측은 용액 혼합 단계에서 구성을 조정함으로써 원단의 질감을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단일 공정인 만큼 재단·재봉 등 생산 단계에서 발생하는 폐기물도 없앨 수 있는데요. 셀룰로오스 용액에 염료를 바로 섞을 수 있어 염색 단계에 드는 물 소비량도 아낄 수 있습니다.

간소화된 공정 덕에 주문형 서비스도 가능한데요. 심플리파이버 측은 이 덕에 재고가 발생할 일이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무엇보다 단일 재료로 생산된 만큼 재활용 시 소재별 분리 공정이 필요 없습니다. 신발의 주원료는 셀룰로오스인 만큼 종이나 의류로 재활용할 수 있을뿐더러, 폐기 시에는 생분해도 가능합니다.

이번에 공개된 신발은 아직 시제품 단계인데요. 밑창은 휴렛팩커드(HP)와 협업해 다른 소재로 3D 프린팅됐습니다.

 

© 마리아 인치 오랑 패션 디자이너 겸 심플리파이버 CEO 유튜브 캡처

지속가능한 패션, 꼭 비쌀 필요는 없으니까! 💰

심플리파이버의 CEO인 오랑은 그간 베라 왕, 켈빈 클라인 등 고급 패션 브랜드에서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베테랑 디자이너입니다. 그가 지속가능한 패션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 것은 15년이 넘었는데요.

오랑 CEO는 “디자이너로서, 비슷하지만 더 비싼 지속가능한 재료를 끊임없이 봐왔다”며 그렇다고 패션업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패션업계는 여전히 가격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는 미 경제 전문지 패스트컴퍼니와 인터뷰에서 “(지속가능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인 관점에서 더 말이 되도록 만들 것”이라며, 티셔츠처럼 저렴한 제품군도 지속가능하도록 만들겠다는 비전을 밝혔습니다.

회사 측은 3D 프린팅 덕분에 88% 더 적은 노동력을 사용했고, 기성 제품보다 30배 더 효율적인 생산 공정을 갖췄다고 설명합니다. 심플리파이버의 이름도 단순화를 뜻하는 영단어 ‘simplify’에서 따왔는데요.

한편, 심플리파이버는 지난 6일(현지시각) 벤처캐피털인 앳 원 원처스(At One Ventures)가 주도한 350만 달러(한화 약46억 원) 규모의 펀딩에 성공했습니다. 투자사는 심플리파이버가 “미래의 의류가 될 수 있다”며 탄소발자국과 낮은 가격으로 다른 브랜드와 상당한 차별점이 있다고 평했는데요.

심플리파이버는 이번 펀딩을 발판삼아 앞으로는 맞춤형 고급 패션에서 일상복으로 생산을 확대해 세계 250억 달러(한화 약 33조 원)에 달하는 직물 및 편물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 목표임을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