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대응 및 에너지안보에 3,690억 달러(약 481조원)을 투입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인해 미국과 유럽연합(EU) 사이의 갈등이 고조됐습니다.

발단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IRA가 전기자동차 등 외국산 제품을 차별화하는 것에 대해 “너무 공격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올해 8월 발효된 IRA는 북미산 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약 990만원)의 세액공제가 적용되고, 배터리 등 전기차 부품·소재에 필요한 광물도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를 맺은 국가를 우선합니다. 이에 우리나라, 일본, EU 등 주요국인 IRA가 차별적 조치라고 비판해 왔는데요.

특히,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미 재무부에 보낸 의견서에서 IRA의 보조금 및 세금 공제 혜택은 수입 제품을 차별할 수 없다는 세계무역기구(WTO) 조항을 위반한다고 명시했습니다.

EU 집행위 내부에서는 미국의 IRA에 맞서 아예 자체적인 보조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는데요. 현재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그리니엄이 정리했습니다.

 

©greenium

EU “IRA가 유럽 내 일자리 없앨 것”…주요 기업 유럽서 미국으로 향해 🗺️

EU 27개 회원국은 기후대응 및 에너지안보 지원 대책을 담은 IRA가 재생에너지·전기차 제조업에서 공정경쟁을 가로막을 것을 우려합니다. 또 유럽의 일자리가 미국으로 대거 흡수될 수 있는 것을 걱정합니다.

특히, 미국을 주요 수출국으로 삼은 독일 자동차 기업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란 전망이 많습니다. 독일상공회의소(DIHK)가 지난 10월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독일 기업 중 미국 투자를 늘리겠다고 응답한 기업 비율은 39%로 유럽 시장 투자를 늘리겠다고 답한 32%보다 7%p 높았습니다.

실제로 최근 자동차 제조업 분야에서 독일 기업의 미국 투자가 증가했다고 DIHK는 덧붙였습니다.

 

▲ 유럽 최대 배터리 생산기업 노스볼트 공장에서 전기차 배터리가 생산되는 모습. ©Northvolt

지난 5일(현지시각) 유럽 최대 배터리 기업인 노스볼트(Northvolt)도 독일 배터리 공장 착공을 연기하고 북미 시장에 선제적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피터 칼슨 노스볼트 최고경영자(CEO)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IRA으로 인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친환경) 모멘텀이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는데요.

세계 2위 재생에너지 기업이자 스페인 최대 전력기업인 이베르드롤라(Iberdrola)도 미국 투자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베르드롤라는 세계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전력망에 360억 유로(약 50조원)를 투자하며, 이 중 미국에만 34%를 투자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그나치오 갈란 이베르드롤라 CEO는 “미국이 이제 훨씬 더 매력적인 투자처가 됐다”고 밝혔는데요.

갈란 CEO는 “미국은 그린수소 생산 설비에 1,000억 달러(약 130조원)를 지원키로 했다”며 “반면, EU는 50억 달러(약 6조원)에 그쳤다”고 꼬집었습니다.

에너지 컨설텅업체 ICIS는 “EU의 그린딜(Green Deal)과 핏포55(Fit for 55) 패키지는 온실가스 배출원 등 오염자를 처벌하도록 설계됐다”며 “(IRA와 달리) 지원 및 보조금 등의 정책이 부족하다”고 분석했습니다.

 

▲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벨기에 브뤠헤 있는 유럽대학에서 지난 4일(현지시각) 연설하는 모습. ©Ursula von der Leyen, 트위터

EU 집행위원장 “IRA, 시장 왜곡…국가 보조금 제도 개편으로 맞설 것” 💰

이 때문에 EU 내부에서는 IRA와 유사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4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헤에 있는 유럽대학 연설에서 “IRA로 인한 시장 ‘왜곡’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국가 보조금 제도를 개편하고 녹색기술로의 전환을 위한 재정 지원 강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같은날 지안카를로 조르게티 이탈리아 재무장관은 “물가를 낮추기 위한 유럽판 IRA를 지지한다”며 가세했습니다. 조르게티 장관은 국가별 방식으로 접근하기보다는 EU 차원에서 통합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티에리 브렌튼 EU 역내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EU 국내총생산(GDP)의 2%인 3,500억 유로(약 481조원)를 신규 기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브렌튼 위원이 밝힌 액수는 IRA와 똑같은데요.

브렌튼 위원은 프랑스 주간지 일요신문(Le Journal du Dimanche)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IRA를 통과시켰고, 중국도 자국 기업을 대대적으로 돕고 있다”며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피력했습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각) 기자회견에서 IRA 개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백악관

미국·EU 태스크포스 회의 “초기적인 진전 주목”…구체적 내용 없어 ⚖️

IRA가 개정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국빈 방문을 했던 1일(현지시각)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IRA 개정 가능성을 처음 시사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3,600여만 달러 규모의 법안을 처리하다 보면 조정이 필요한 결함(Glitches)이 생긴다”며 “유럽 국가들이 근본적으로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미세한 조정 방안(Tweaks)들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5일(현지시각) 미 메릴랜드대에서 열린 ‘제3차 무역기술위원회(TTC)’ 회의 뒤 미국과 EU는 공동성명을 통해 “IRA에 대한 초기적인 진전이 있었음에 주목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건설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는데요.

앞서 올해 10월 25일(현지시각) EU가 전기차 보조금 차별 문제 등 IRA와 관련한 이의를 제기함에 따라 미국과 EU는 관련 논의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출범했습니다. 이후 매주 관련 회의를 진행 중인 상황.

 

▲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수석부위원장(왼쪽)과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U 경쟁담당 부집행위원장(오)이 5일(현지시각) 열린 미국·EU 무역기술위원회(TTC) 회의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oberto Schmidt, European Union, 2022

다만, 이날 회의에서 전기차 보조금 관련 IRA 법안 개정 여부 등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협상은 주로 IRA 논의보다는 반도체 공급망 교란에 대한 핵심광물 조기경보시스템과 보조금 정보를 공유하고 일치하는데 할애됐습니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U 경쟁담당 부집행위원장은 미 외교안보 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기후변화와의 싸움에 동참하게 돼 매우 기쁘다. 허나, 기후변화에 함께 맞서 싸우기 위해 각자의 산업 기반을 늘림으로 인해 유럽 내 산업 기반이 얇아질 위험에 처했다”고 꼬집었는데요. 그러면서 “(태스크포스에서) 세부 논의가 필요한 분야를 정했다”며 빠른 시일 안에 세부 규정을 논의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 재무부는 올 연말까지 IRA 시행에 따른 보조금 지급 세부 규정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 현대차가 2019년에 공개한 45 일렉트린 콘셉트카의 모습. ©현대차

미 재무부 올 연말 IRA 세부 규정 발표…한국 정부 현재 대응 상황은? 🇰🇷

한편, 우리 정부도 IRA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 합동대표단이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닷새간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과 EU 간 TTC에서 ‘초기적 진전’이 있었다는 내용의 성명에 대해 “아직은 EU와 미국 간에도 큰 진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안 본부장은 “미국은 우리나라와 EU의 여러 제안을 취합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아직 미국이 구체적으로 해결방안을 들고 나온 것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미 재무부가 세부 규정과 관련해 각국의 입장을 최대한 수렴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는데요.

우리 정부는 일단 IRA 이행을 위한 하위규정을 마련 중인 미 재무부에 ▲전기차 최종조립 요건 완화 ▲배터리, 광물·부품 요건 구체화 ▲상업용 친환경차 활용 확대 ▲청정 제조 투자 세액 공제 확대 등을 제안했습니다.

또 미국 상·하원에선 전기차 세액공제 요건을 3년 유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안이 발의된 상황입니다.

그러나 합동대표단이 만난 미 의회 의원 상당수는 레임덕 회기(중간선거와 새 의회 출범 사이 시기) 내에 IRA 개정안 통과가 어렵다는 뜻을 내비쳤는데요. 미 백악관도 의회를 통한 법 개정 계획이 없다고 확인해 개정 자체가 쉽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 한미 양측 대표단은 IRA 시행 과정에서 한국이 EU 등 타 국가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데 공감했다고 산자부는 밝혔습니다.

 

+ 현대차 ‘IRA 시험대’ 놓여 🚗
미 경제전문매체 CNBC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기아차, 제네시스를 합쳐 올해 미국 신차 시장에서 11%에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기록했습니다. CNBC는 현대차가 1986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이라고 밝혔는데요. 다만, CNBC는 IRA 시행에 따라 전기차 보조금 차별을 받을 것이 향후 시험대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도 북미산 전기차에만 세제혜택이 주어지는 IRA에 대해 “우려스럽고 매우 도전적인 이슈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