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개체수 급감으로 인해 식량안보에 경고등이 켜진 가운데 미국 정부가 세계 최초로 꿀벌용 백신 사용을 허가했습니다.

지난 4일(현지시각) 미 바이오기업 ‘달란애니멀헬스(Dalan Animal Heatlh)’는 성명을 통해 “미 농무부(USDA)로부터 자사와 조지아대학이 공동 개발한 꿀벌 전용 전염용 백신의 조건부 사용을 승인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이 백신은 세균성 꿀벌 전염병인 ‘미국 부저병(American Foulbrood Disease)’을 예방합니다. 이 병에 감염된 꿀벌 유충은 몸체가 썩고 벌집이 파괴돼 꿀벌 군집 전체가 죽습니다. 세균에 의한 꿀벌 질병 중 가장 많이 발생하며, 전염성이 높아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질병 중 하나입니다.

 

▲ 꿀벌 유충이 미국 부저병에 감염되면 몸체가 썩고 감염이 군집 전체로 확산된다 사진은 미국형부저병에 감염된 꿀벌 유충이 썩어 액체가 된 모습 ©USDA

미국 부저병은 20세기 초 세계에 널리 퍼졌고,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부저병에 노출된 꿀벌 군집이 전체 4분의 1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농림축산식품검역본부에 따르면, 국내에서 미국 부저병이 보고된 것은 1950년입니다. 중부지방에서 처음 발생했고, 당시 국내 양봉업계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는데요. 현재까지도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발병하고 있습니다.

미국 부저병은 치료제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감염된 벌집과 양봉 기구를 소각하는 것이 유일한 대응 방법이었습니다.

 

©Tyler Jones UFIFAS

‘꿀벌 군집 붕괴 현상’ 전 세계 만연…2022년 국내서 꿀벌 약 18% 실종 😥

세계적으로 꿀벌 개체수 급감 속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꿀벌 군집 붕괴 현상(CCD)’으로 정의되는 현상은 2006년 11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보고된 이후 세계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꿀벌 개체수 손실 조사를 해온 비영리단체 BIP(Bee Informed Partnership)에 따르면, 2020년 4월부터 2021년 4월까지 1년 동안 미 양봉업계는 45.5%의 꿀벌 군락을 잃었습니다. 이는 2006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두 번째로 높은 손실률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촌진흥청과 한국양봉협회 추산으로 지난해 겨울 이후 전국의 꿀벌 중 약 18%가 사라졌습니다. 월동에 들어갈 무렵 벌통 안에 있는 꿀벌 개체수가 대략 1만 5,000마리 정도인데,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전국에서 약 60억 마리의 벌이 사라졌습니다.

꿀벌 개체수 급감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미국형 부저병과 같은 질병, 살충제, 기후변화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습니다.

꿀벌 개체 수 급감은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결과로 직결됩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 중 70% 이상이 꿀벌과 같은 화분매개곤충의 수분활동 도움을 받아 생산됩니다.

이는 또 농업과 경제 전반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데요. 유엔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는 꿀벌의 경제적 가치를 최대 5,770억 달러(약 730조원)로 추정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꿀벌용 백신 개발 소식이 양봉업계에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단 평가가 나옵니다.

 

▲ 달란애니멀헬스가 만든 꿀벌용 백신은 여왕벌이 먹는 로열젤리와 혼합된다왼 일벌이 해당 로열젤리를 운반한다오 ©Dalan Animal Health 홈페이지 캡처

꿀벌용 백신, 여왕벌 먹는 로열젤리에 투입해…“꿀벌 보호 돌파구 될 것” 🐝

이번에 조건부 승인을 받은 꿀벌용 백신은 벌에 직접 주사를 놓는 건 아닙니다.

여왕벌에게 백신이 들어간 먹이를 먹이는 것인데요. 먼저 여왕벌의 먹이인 로열젤리에 백신용으로 배양된 비활성 상태의 세균을 첨가합니다. 여왕벌이 로열젤리를 먹은 후 항체를 생산하고, 태어난 꿀벌 유충에 항체가 형성되게 하는 원리입니다. 이를 통해 꿀벌 군집 전체가 항체를 획득함으로써 사망률이 낮아지는 것.

해당 백신에 대한 연구 결과는 이번 승인에 앞서 지난해 10월 과학저널인 ‘수의학 프론티어(Frontiers in Veterinary Science)’에 발표됐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신을 받은 여왕벌에서 태어난 꿀벌은 백신을 맞지 않은 여왕벌이 있는 꿀벌보다 미국 부저병 감염에 더 저항력이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백신 개발에 참여한 키스 델라플란 미 조지아대 교수는 “여왕벌 난소에 백신 성분이 쌓이면 유충들이 면역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미국 부저병에 항체가 형성된 일벌이 유충에게 먹이를 주는 과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델라플란 교수는 덧붙였는데요. 그는 포유동물이 모유를 통해 전달되는 항체로 수동면역을 얻게 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달란애니멀헬스의 최고경영자(CEO)인 아네트 클라이저는 “우리 백신이 꿀벌 보호의 돌파구가 되길 기대한다”며 “전 세계 식량 생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해당 백신은 상업용 양봉 농가에 제한적으로 배포될 계획이며, 올해 미국에서 먼저 시판될 것이라고 클라이저 CEO는 밝혔습니다. 회사 측은 미국형 부저병 이외의 다른 세균성 꿀벌 전염병도 예방할 수 있는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습니다.

 

▲ 달란애니멀헬스 조지아대 연구팀과 함께 꿀벌용 백신을 실험하는 모습 ©Dalan Animal Health 페이스북

美 양봉업계 “감염 예방 비용 절감 기대”…향후 대규모 연구 필요 🍯

미 농무부는 “긴급상황, 한정된 시장, 지역상황 또는 특별한 상황에 부합”하고 “순수하고 안전하며 합리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제품에 대해서만 조건부 사용 승인을 발급합니다.

즉, 꿀벌 개체수 급감을 우려한 미 정부가 꿀벌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미 양봉업계는 꿀벌용 백신 도입 소식을 반기는 중입니다.

미 캘리포니아주 양봉가협회의 트레버 타우저 이사는 “양봉 농가에 즐거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간 양봉업계는 꿀벌 세균성 질병 예방을 위해 막대한 양의 항생제를 사용해 왔습니다. 이로 인한 비용 문제는 물론 항생제 내성 위험성까지 대두됐는데요.

타우저 이사는 “(미국 부저병)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면 치료에 들어가는 큰 비용을 절감해 꿀벌의 건강을 유지하는 다른 중요한 요소에 집중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꿀벌 건강 개선은 곧 양봉업계의 생산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꿀벌용 백신의 보급 확산을 위해선 대규모 현장 실험이 필요하단 전문가 제언도 나왔습니다. 미 오리건주립대 원예학과 벌 연구소(Bee Lab)의 라메시 사길리 교수는 과학전문지 파퓰러사이언스(Popular Science)에 기고를 통해 “(꿀벌용 백신을 통해 얻은) 항체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또 여러 미국형 부저병 변종에 백신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향후 대규모 현장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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