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7일(현지시각) 애플이 ‘자가 수리(Self Service Repair)’ 프로그램을 전격 도입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소비자의 자가수리권(Right to Repair)을 보장하기 위해서인데요. 당장 2022년부터 아이폰12와 13을 소유한 고객은 화면·배터리·카메라 등 각종 부품과 수리 도구를 구입해 집에서 고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를 위해 애플은 관련 부품을 별도 판매하고 수리 설명서와 교육도 제공한다고 밝혔죠. 애플은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한국, 영국 등 전 세계로 확대할 계획인데요. 대상 제품도 맥북이나 아이패드 등 다른 제품으로 확대한다고 합니다.

애플의 이같은 결정에 소비자들은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그간 애플은 개인정보 유출 등 보안상의 이유로 자가수리권에 반대해 왔는데요. 특히, 수리 설명서의 경유 기업의 미공개 기술이나 지식재산권이 침해될 수 있단 점을 우려해 왔죠. 그런데 돌연 애플은 왜 자가수리권을 허용했을까요?

 

미 정부 행정명령 때문에 주눅 든 애플 🇺🇸

먼저 자가수리권(Right to Repair)은 소비자가 본인 소유 기기를 스스로 수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대개 고장난 전자기기는 제조사 서비스 센터를 통해 수리를 맡기는데요. 도시가 아니면 서비스 센터 접근성이 좋지 않고, 수리 비용 부담도 높단 문제가 계속 지적됐죠.

이럴 바에야 소비자 스스로 직접 수리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해 달란 것이 자가수리권의 주 내용인데요. 자가수리권을 놓고 관심이 본격적으로 쏠린 시점은 2012년입니다.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자동차 제조업체가 자동차 소유자 및 독립 수리점에게 차량 진단, 서비스, 유지 혹은 수리에 필요한 정보와 장비 등을 제공해야 한다는 ‘자동차 소비자 수리 권리법(Motor Vehicle Owners Right to Repair Act)’이 통과됐는데요. 비록 연방법은 아니었으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미국 다른 주에도 이 법을 적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 2021년 기준 미국 내 수리권 법안 발의 현황 인포그래픽화_The Repair Associastion 제공

당시 애플을 비롯한 IT업계는 자가수리권이 자동차가 아닌 다른 분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는데요. 이들의 우려와 다르게 해당 매사추세츠주 내 법안 발의 후 전자기기 전반에 걸친 수리권 움직임이 미국 전역으로 확대됐습니다. 미국 공익연구단체(PIRG)에 의하면 2021년 10월 기준, 의료기기, 전자기기, 가전제품 등 주별로 자가수리가 허용된 품목은 다르나 적어도 미국 27개 주(州)에서 수리권 법률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의미있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는데요. 지난 7월 바이든 대통령은 제조업체가 자가 또는 제3자 수리에 부과하는 불공정한 제한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을 수립하고, 애플과 같은 IT업체들의 수리 제한 관행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은 정책성명을 채택합니다. 즉, 소비자나 독립 수리업체가 전자기기를 알아서 사용할 권리를 확보할 것을 촉구한 것인데요. 같은달 애플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도 소비자의 자가수리권을 보장하는 미국 정부의 행정명령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는 내용을 말해 애플과 충돌을 빚었죠.

 

👉 애플 공동창업자 vs 애플, “알아서 수리하게 해줘야”

 

© 아이픽스잇이 진행한 아이폰13 분해 콘텐츠_ifixit 제공

애플 제품 ‘공인 서비스 센터’에서 소프트웨어 승인돼야만 작동해 🛠️

여론도 애플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기계 수리를 돕기 위한 수리 전문 커뮤니티인 ‘아이픽스잇(iFixit)’이 밝혀낸 사실 때문인데요. 지난 11월 4일 아이픽스잇은 아이폰13 분해 콘텐츠를 올리며 해당 제품의 디스플레이를 교체하면 페이스ID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단 사실을 발표합니다. 페이스ID는 사용자 얼굴 인식을 통해 보완을 유지하는 기능인데요. 디스플레이 교체에 필요한 고가의 전용 공구가 애플 공인 수리센터에만 제공될뿐더러, 정품 부품 교체에 성공해도 공인 서비스센터에서 소프트웨어를 통해 일련번호를 등록하고 승인받아야만 활성화된 것이죠.

이 사실이 알려진 직후 애플은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더 버지(The Verge)와의 인터뷰에서 디스플레이 교체 후 페이스ID가 계속 작동하도록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출시할 것”이라고 밝혔는데요. 아이픽스잇은 “이는 화면 수리에 더 많은 시간과 기술이 필요하게 만들어 사설 수리업체들을 곤경에 빠뜨린다”고 지적하며, 이것은 보완 문제가 아닌 자가수리에 대항하는 조치라며 애플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 아이폰 시리즈를 수리 중인 공인 수리센터 모습_Apple 제공

자가수리권 정책 도입한 애플…‘반쪽에 불과하단’ 목소리도 나와 🤔

미국 정부의 조치, 각종 여론의 뭇매 때문일까요? 결국, 애플은 소비자 및 제3자의 자가수리를 허용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프로그램이 시행되면 아이폰12와 아이폰13 사용자는 디스플레이·배터리·카메라 등 고장이 잦은 부품을 ‘애플 셀프 서비스 수리 온라인 스토어’에서 구입해 직접 수리할 수 있죠. 수리 전용 도구도 구매할 수 있는데요.

다만, 애플은 ‘전자기기 수리와 관련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용자’를 프로그램 대상으로 한정했습니다. 전문 수리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면 정품 부품을 사용하는 전문 수리 서비스 업체를 방문하는 것이 안전하단 것이 애플의 설명인데요. 구체적인 부품 가격도 아직 공개되지 않았단 점 등을 이유로 일각에선 부품 장사에 불과하단 비판이 일고 있죠.

실제로 아이폰 시리즈는 배터리 교체에만 최대 8만 원의 비용이 들어가는데요. 사설 업체에서 수리를 진행할 경우 배터리 교체 및 도구 사용에만 최대 2만 원이 필요하죠. 즉, 애플의 정품 부품 및 전용 도구를 구매해야만 하는 제도가 되려 자가수리권의 범위를 축소했단 것인데요. 이에 프로그램의 실효성을 갖추려면 소비자 눈높이에 맞는 합리적 수준의 부품 가격 설정과 규정 마련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 브뤼셀에서 자가수리권 보장을 외치는 시위 현장_The Restart Project 제공

세계 전자폐기물 모니터링(GESP)가 발표한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기준 전 세계에서 배출된 전기전자폐기물은 5,360만 톤으로 5년 새 21% 증가했는데요. 2030년에는 7,4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이죠.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을 줄이고,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요국들은 앞다퉈 자가수리권을 보호하는 정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주요 제조업체들은 지식재산권 침해·안전 및 보안 우려·개인정보 유출 등을 근거로 수리권 확대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가수리권 확대를 위해선 충전기 같은 부속품의 장기화, 수리·재활용이 용이한 디자인, 수리 설명서 제공 등이 함께 논의돼야 하는데요. AS 정책에 있어 가장 폐쇄적이면서도 연간 억대가 넘는 핸드폰을 판매하는 애플의 행보에 따라 자가수리권의 성공이 좌우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