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에너지기구(IEA)는 미래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수송용 연료 부문은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는데요. 반면, 석유화학 부문은 향후 유일하게 성장하거나 안정을 유지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실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초기인 2020년 수송용 연료 수요는 전년 대비 13% 감소했는데요. 석유화학 부문은 같은기간 수요를 탄력적으로 유지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침체된 경제가 회복되면서 플라스틱·합성섬유·화장품·의약품 등 석유화학제품의 수요가 급증한 상황. IEA는 중기적으로 석유화학산업이 세계 석유 수요 회복을 주도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석유화학제품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여기에 반기를 든 기업이 있습니다.

2013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설립된 생명공학 스타트업 이볼브드바이네이처(Evolved By Nature)의 이야기인데요. 이 기업이 석유화학물질을 대체하고자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누에고치란 사실!

 

©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액상 형태의 천연 실크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 회사를 공동 설립한 그레고리 알트만왼과 레베카 라쿠튀르오 박사의 모습 Evolved By Nature

실크 연구 분야 선구자들이 설립한 이볼브드바이네이처 🧪

이볼브드바이네이처의 공동설립자인 그레고리 알트만레베카 라쿠튀르 박사는 실크 연구분야의 선구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각각 생명공학과 생명의학을 전공한 두 과학자는 학생 시절부터 실크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요.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인체 연조직 재건을 위한 실크 기반 의료기기 개발에도 성공한 경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초기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실크의 천연단백질을 이용해 스킨케어 제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라쿠튀르 박사는 20대 시절 난소암을 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항암화학요법 치료를 받는 암 환자들의 피부 관리를 돕고 싶었는데요.

이들은 누에고치의 주성분인 실크가 보습성과 생물학적 적합성이 뛰어나단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이는 실크를 구성하는 세리신(Sericin)피브로인(Fibroin)이란 두 단백질 덕분인데요. 다만, 세리신은 일부 사람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 활용에 어려움을 겪던 상황.

이에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실크에서 세리신만 제거하고 순순한 피브로인 단백질만 액상으로 추출하는 기술, 액티베이티드 실크(Activated Silk)를 개발하는 데 성공합니다.

 

© 누에고치에서 피브로인만 추출하기 위한 액티베이티드 실크 크게 3단계를 거쳐 생산된다 Evolved By Nature

액티베이티드 실크, 기존 화학물질 대체할 것으로 기대돼 🐛

누에고치에서 피브로인 단백질만 추출하는 액티베이티드 실크. 크게 3단계를 거쳐야 하는데요. 먼저 누에고치를 바닷물에 씻은 다음 헹궈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누에고치 표면의 끈적끈적한 세리신 층이 제거되고 순수 피브로인만 남는데요.

여기에 다시 염수(소금물)를 투입해 섬유를 액체로 바꿉니다. 이 과정에 스며든 소금은 회사가 보유한 특허 기술의 정제과정을 통해 제거되는데요. 그 결과, 순수 피브로인으로만 구성된 실크 단백질을 얻게 됩니다.

누에고치에서 피브로인을 분리한 기술을 개발한 기업은 이볼브드바이네이처가 처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추출한 피브로인을 액화시키고 안정시키는 데까지 나아간 최초의 기업인데요.

액티베이티드 실크는 스킨케어 제품으로 사용할 경우 피부 진정 및 보습 효과를 선사하며, 가죽과 직물 제품 코팅에 사용되는 유해 화학물질을 대체해준단 것이 회사 측의 설명입니다. 액화된 실크 단백질이 다른 물질과 결합하는 특성을 지닌 덕분인데요.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액티베이티드 실크가 섬유, 스킨케어, 의료 분야에서 기존 화학성분을 대체하는 물질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2019년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은 이볼브드바이네이처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iStock

샤넬 등 명품 브랜드가 반한 이볼브드바이네이처 👝

액티베이티드 실크는 미국 스킨케어 브랜드들이 원료로 활용 중인데요. 액티베이티드 실크가 가장 활발하게 사용 중인 분야는 단연 섬유 및 패션 분야입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은 이볼브드바이네이처의 지분 일부를 인수한 상황입니다. 2019년 샤넬은 자사의 그린 테크놀로지(Green Technology) 투자 전략에 최적화된 파트너로 이볼브드바이네이처를 선택했는데요.

당시 샤넬은 이볼브드바이네이처의 혁신적인 소재가 첨단 소재를 개발하겠단 자사 목표와 부합하다고 밝혔습니다.

이밖에도 영국 액세서리 브랜드 안야 힌드마치(Anya Hindmarch) 같은 패션 브랜드와 미국 현지 가죽 제혁소, 나일론 공장 등이 액티베이티드 실크를 사용 중입니다.

섬유 및 패션 분야가 이볼브드바이네이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액티베이티드 실크를 ‘원단을 더 오래 입을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소개합니다. 회사 측은 액티베이티드 실크를 섬유에 사용할 경우 흡습성과 색상 내구성이 향상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는데요. 섬유 원형 복구 및 수축에 강한 물성을 부여하는 특성 또한 확인됐습니다.

예를 들어 캐시미어의 보풀(pilling)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폴리에스터나 나일론 같은 합성섬유의 수명을 좀 더 연장시킬 수 있단 것인데요. 이 점 때문에 액티베이티드 실크를 찾는 브랜드 및 가죽공장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 Evolved By Nature

이볼브드바이네이처, 시리즈C 펀딩에서 1575억 원 유치 성공 💰

이볼브드바이네이처의 공동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알트만 박사는 실크가 살충제나 화학비료가 필요하지 않은 지속가능한 직물임을 강조합니다. 알트만 CEO는 경제전문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실크는 석유화학과 무관한 혁신적인 공급원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는 이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실크의 가장 매혹적인 점은 말 그대로 자연이 제공하는 플라스틱이란 점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현재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중국, 일본 등에서 누에고치를 수급받고 있습니다. 회사 측은 표면에 흠집이 나 버려진 누에고치들도 사용할 수 있단 점을 강조하는데요. 버려진 자원을 활용할 뿐더러, 기존 화학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하는 것이 순환경제 전환과 연결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최근 시리즈 C 펀딩에서 1억 2,000만 달러(한화 1,575억원) 규모의 자금 조달에 성공했습니다.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회사 측은 미국 투자기업인 세네터인베스트먼트그룹(Senetor Investment Group)과 벤처캐피탈 TVG(Teachers’ Venture Growth)가 이끄는 펀딩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단 소식을 밝혔는데요.

역대 최고 모금액으로 마무리된 이번 펀딩 덕에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총 2억 1,100만 달러(한화 약 2,769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게 됐습니다.

 

©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본인들을 기후테크와 순환경제 기업이라고 소개한다 Evolved By Nature Facebook

회사 측은 매사추세츠주 월폴(Walpole)에 가동 중인 생산 시설 확장에 이번 펀딩이 사용될 계획임을 밝혔는데요. 올해 5월부터 가동된 해당 시설은 액티베이티드 실크를 연간 150톤씩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볼브드바이네이처는 시설 투자를 통해 액티베이티드 실크 생산량을 오는 2024년까지 900톤까지 늘리겠다고 밝혔습니다.

회사 측은 액티베이티드 실크 900톤은 비생분해성 석유화학 계면활성제 7,200톤를 대체하는 것과 맞먹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올리비아 스티드맨 TVG 전무이사는 “실크단백질 활용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고 평했는데요.

이볼브드바이네이처의 알트만 CEO는 “석유화학제품의 남용은 인류와 행성의 유지 시스템을 변화시켰다”며 “(이번 모금 덕에) 산업과 생태계 간의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글로벌 공급망을 재구상할 수 있게 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회사 측은 향후 모든 종류의 화학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녹색화학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목표임을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