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 220표 대 반대 207표, 기후대응‧세제개편‧보건의료강화를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Inflation Reduction Act)이 12일(현지시각) 미국 하원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미 상원을 통과한지 불과 닷새만인데요. 이로서 IRA 법안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서명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하원 통과 직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기후변화 대책과 에너지 안보에 있어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라며 조만간 법안에 서명할 계획임을 밝혔습니다.

7,390억 달러(약 965조원)에 달하는 IRA 법안, 바이든 정부가 초창기부터 추진한 ‘더 나은 재건(BBB)’ 법안을 축소했단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IRA 법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간의 타임라인(기한)을 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 제시된 날짜는 모두 미국 동부 현지시각을 기준으로 합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0년 7월 9일 ‘더 나은 재건(Built Back Better)’이란 구호와 함께 500만여개의 신규 일자리 창출 공약을 발표했다_Joe Biden, Facebook

미국 기후대응의 원대한 시작, BBB 계획 📢

바이든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기후변화를 전 세계와 미국이 직면한 ‘가장 긴급한 위기’로 지칭했습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제46대 미국 대통령 취임 첫날인 2021년 1월 20일 첫 업무로 파리협정 복귀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합니다. 기후변화 회의론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일자리를 죽인다’는 이유로 파리협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인데요.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구호로 밀어온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을 정책 기조로 내걸고, 침체된 경제‧산업을 재건하고 대외경쟁력을 강화해 기후변화 대응에 나설 계획을 밝혔습니다.

 

© 바이든 행정부 초기 ‘더 나은 재건’ 계획(BBB Plan)은 크게 구조계획, 일자리계획, 가족계획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_백악관 제공

일명 ‘더 나은 재건 계획(BBB Paln)’의 시작인데요. 이 계획은 ▲미국 구조계획(ARP), ▲미국 가족계획(AFP), ▲미국 일자리계획(AJP) 등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각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피해 회복을 위한 경기 부양(ARP), 공교육‧육아휴직‧병가 확대 등 교육 및 복지 개혁(AFP), 사회기반시설 및 재생에너지 산업 확대로 일자리 확대 및 기후문제 대응(AJP)이 주요 골자입니다.

그러나 BBB 계획은 공화당 및 민주당 일부 의원의 저항으로 일괄 추진에 실패합니다. ARP는 초당적 지지를 받으며 통과했지만, AFP는 입법화에 실패했는데요. AJP 또한 기반시설 투자 부문만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 법안(IIJA)’이란 이름으로 지난해 11월 입법화에 성공합니다.

즉, AJP 법안에 담겨있던 기후 및 환경 투자 등 기후대응정책은 제외된 것. 이에 일자리계획 중 기후 및 환경 투자, 기후대응정책 관련 내용은 AFP와 통합돼 ‘더 나은 재건 법안(BBB Act)’이란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추진됩니다.

 

© 수정된 BBB 법안은 2021년 11월 19일(현지시각) 미 하원 투표에서 찬성 220대 반대 213으로 가결됐다_WP, 유튜브 캡처

2021년 11월 19일: 사회안전망‧기후대응 앞세운 BBB 법안…하원 통과해 🏛️

더 나은 재건 법안. 일명 BBB 법안은 사회안전망과 기후대응을 위해 향후 10년간 3조 5,000억 달러(약 4,545조원) 규모의 재원 투입을 목표했습니다.

허나, BBB 법안은 일부 민주당 의원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1조 7,500억 달러(약 2,068조원)로 축소됩니다.

수정된 BBB 법안은 향후 10년간 ▲재생에너지 개발 시 세제혜택 제공, ▲송전선 및 에너지저장설비 개선, ▲전기차 및 재생에너지 산업 개발 등에 총 3,200억 달러 (약 417조원)를 투입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아울러 기후대응복원력 향상과 재생에너지 기술 공급망 확대에 각각 1,050억 달러(약 124조원)와 1,100억 달러(한화 143조원)가 예산으로 배정됐습니다.

백악관은 수정된 BBB 법안에 포함된 세제혜택 덕에 중산층 가정 내 전기차 구매 비용이 1만 2,500달러(약 1,600만원)로 낮아지고, 지붕 태양광 패널 설치비도 30% 절약될 것으로 평가했는데요.

BBB 법안은 지난해 11월 19일 미 하원 투표 결과, 찬성 220대 반대 213으로 가결됩니다. 하원 통과에 따라 BBB 법안은 상원 통과 및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 절차만 남겨둔 상황이었는데요.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포함한 민주당 지도부와 백악관은 BBB 법안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 2021년 12월 19일(현지시각) 조 맨친 민주당 상원의원은 폭스뉴스 선데이에 출연해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BBB 법안에 찬성표를 던질 수 없다고 밝혔다. 이날 백악관은 장문의 반박 성명을 내고 이례적으로 맨친 의원을 정면 겨냥했다_Fox News Sunday, 유튜브 캡처

2021년 12월 19일: 크리스마스 D-6, 맨친 의원 폭스뉴스 출연해 ‘폭탄 선언’ 🗣️

결과부터 말한다면 이 계획은 실패합니다. 문제는 지난해 12월 19일 오전에 일어났습니다. 중도·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조 맨친 민주당 상원의원이 폭스뉴스 선데이(Fox News Sunday)에 출연해 폭탄 발언을 던진 것인데요. 맨친 의원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했으나, 나는 (BBB 법안을) 지지할 수 없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상원 의석 수는 총 100석. 현재 미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50대 50으로 나뉘어 있어, 당내에서 단 한 명의 이탈표가 나와도 법안 통과가 불가능합니다. 이에 백악관과 민주당은 오랫동안 맨친 의원 설득에 공들였습니다.

미국 석탄산업의 중심지인 웨스트버지니아주 상원의원인 맨친 의원은 BBB 법안에 기후대응예산과 부유층 증세가 포함되는 것을 반대해 왔습니다. 석탄중개사업을 소유한 맨친 의원은 화석연료에 불이익을 주는 기후정책에 반대했는데요. 실제로 민주당 지도부는 맨친 의원을 설득하기 위해 BBB 법안 예산 규모를 계속 줄여온 상황이었습니다.

맨친 의원의 공개 반대 선언에 백악관은 발끈했습니다. 젠 사키 당시 백악관 대변인 이날 밤 성명을 내어 맨친 의원의 선언은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입장 번복”이라며, “이는 대통령과 동료 의원들에 대한 약속 위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법안 처리는 하염없이 늦춰쳐 BBB 법안의 상원 통과가 사실상 좌초됩니다.

 

© 7월 20일(현지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매사추세츠주의 옛 석탄화력발전소를 해상풍력발전설비 제조시설로 탈바꿈하고 있는 브레이턴포인트(Brayton Point) 발전소를 방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기후위기에 맞서기 위해 나의 행정 권한을 사용할 것”이라며 기후문제 해결을 위해 ‘비상사태’ 선포를 적극적으로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_Joe Biden, Facebook

2022년 7월 20일: 지지부진한 상원 협의, 바이든 ‘비상사태 선포’까지 고려 🚨

이에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는 맨친 의원을 설득하기 위해 올해 7월까지 여러 차례 협상을 진행합니다. 맨친 의원이 BBB 법안 처리에 긍정적 입장을 보여 활로가 모색되는 듯했으나, 7월 15일 다시 찬성할 수 없다고 밝히는데요.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초기부터 중점적으로 추진해온 BBB 법안이 상원에서 무산된 상황. 나흘 뒤인 7월 19일 워싱턴포스트(WP)는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 말들을 인용해 바이든 대통령이 ‘비상사태’ 선포를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는데요. 이튿날 7월 20일 바이든 대통령은 “기후위기에 맞서기 위해 나의 행정 권한을 사용할 것”이라고 발언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말한 행정 권한은 비상사태 선포(National Emergencies Act)입니다. 이는 미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권한으로, 천재지변이나 전쟁 위기 등 국가적 비상시에 정부가 신속히 대처할 필요성이 있을 때 부여됩니다.

BBB 법안이 의회 입법을 통해 예산 확보가 어려운 만큼, 바이든 정부가 ‘비상사태’ 선포라는 우회를 통해 자금 조달에 나서려고 했던 것인데요. 바이든 대통령이 기후문제 해결을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할 경우 재생에너지 전환 및 기후대응정책을 위해 연방 자원과 행정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됩니다.

허나, 바이든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당초 민주당 일부 의원과 환경단체들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을 촉구했는데요.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The Hill)은 백악관이 7월 20일 기후변화 비상사태를 선포할 계획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단 조언이 있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오)는 조 맨친 의원(왼)을 설득해 BBB 법안을 대폭 수정한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를 내놓았다_greenium

2022년 7월 27일: 극적 반전 이끈 척 슈머 민주당 원내대표 ⚖️

‘여당 내 야당’으로 불리는 맨친 의원 설득에 실패한 바이든 대통령. BBB 법안 처리 난항을 겪는 가운데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반전을 이끌어 냈습니다.

척 슈머 원내대표가 맨친 의원을 직접 설득했는데요. 7월 27일, 슈머 원내대표는 기후대응‧세제개편‧보건의료강화를 골자로 한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에 맨친 의원이 합의했다고 발표합니다.

슈머와 맨친 의원은 공동 성명에서 “오늘 합의를 발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는데요. 이날 합의 성명 및 IRA 법안 존재를 사전에 알고 있던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조차 IRA 법안의 구체적인 세부내용을 몰랐는데요.

맨친 의원은 성명에서 “건강보험과 처방약 비용을 낮추는 대신 에너지안보와 기후솔루션 같이 미국에게 필요한 부문에 투자하도록 할 것이다”며 “인플레이션을 줄이고 미래 미국이 직면한 주요 도전에 초점을 맞춘 정책 통과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 greenium

돌연 합의한 맨친 의원, ‘짜고 친 연극’이란 분석도! 🤔

맨친 의원이 돌연 입장을 번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하나는 맨친 의원이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정치상황 때문입니다. 지난 한해 맨친 의원은 BBB 법안 처리에 입장을 번복해 오며 민주당 내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공화당 텃밭인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민주당원은 물론 민주당이 맨친 의원을 지지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 것인데요. 오는 2024년 상원의원 선거를 고려한 판단이란 분석입니다.

둘째는 향후 기후 및 에너지 관련 법안을 처리할 통로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하원의 다수당 지위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넘어갈 것이란 여론조사가 나왔는데요. 하원 다수당 지위가 공화당으로 바뀌면 향후 법안 처리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단 점에 맨친 의원이 동의한 것입니다.

한편, 그간 공화당에서는 반도체법* 통과를 볼모로 BBB법안 통과를 저지해왔는데요. IRA 법안이 민주당 내부 반대로 지지부진한 사이, 반도체법은 미 상원에서 찬성 64대 반대 33으로 가결됩니다. 이 때가 7월 27일(현지시각)이었는데요. 그후 채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슈머와 맨친 의원이 IRA 법안을 발표한 것. 이에 이 모든 것이 공화당을 속이기 위한 맨친 의원의 ‘연기’였단 분석도 제기됐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비상사태 고려부터 IRA 법안 발표 후 상하원 가결에 이르는 이 모든 일이 불과 한 달 남짓 동안 일어났습니다.

 

*반도체법(Chips for America Act): 미국 내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적 우위 유지를 위해 2,800억 달러(약 366조원)를 자국 내 투자하는 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