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및 천연가스 발전을 지속가능한 금융 분류체계(Taxonomy·택소노미)에 포함하는 최종안이 유럽연합(EU) 의회 상임위원회에서 부결됐습니다. 지난 2월 택소노미에 원전과 천연가스를 포함하기로 한 EU 집행위원회 결정을 뒤집은 것인데요.

EU 의회 산하 경제통화위원회와 환경보건식품안전위원회는 14일(현지시각) 이같은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발표했습니다.

EU 경제위·환경위원회는 이날 열린 합동회의에서 원전·천연가스 발전을 EU 택소노미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찬성 76표·반대 62표·기권 4표로 채택했습니다.

두 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원전과 천연가스가 지속가능한 경제 전환을 위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임은 인정한다”고 밝혔는데요.

다만, 원전과 천연가스를 포함시킨 EU 택소노미 최종안의 기술심사기준은 택소노미 규정 제3조에 명시된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 기준’을 준수하지 않고 있단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날 소위의 표결은 EU 집행위 결정을 뒤집은 것이나 EU 택소노미 내용이 확정된 것은 아닌데요.

원전 및 천연가스가 포함된 EU 택소노미 결의안은 다음달 초 열리는 EU 의회 본회의 표결을 거쳐 11일까지 최종 결정됩니다. EU 의회 의원 705명 중 절반 이상이 반대하거나, 27개 회원국 중 20개가 반대할 경우 집행위는 결의안을 철회하거나 수정해야만 합니다.

 

+ EU 집행위와 의회의 차이를 알고 간다면? 🤔
흔히들 EU 집행위를 행정부에 비유하는데요. EU 의회는 입법부 역할을 수행합니다. EU 의회는 크게 입법권, 기관 자문 및 감독·통제권, 예산안 심의권 등의 권한을 갖는데요. 법률발의권은 없으나, EU 집행위가 제안한 법안에 대해 심의·의결권을 갖고 있어서 법안을 거부하거나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EU 의회에서 연설 중이다 European Union 2021 Flickr

EU 의회 소위는 왜 ‘택소노미’ 보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걸까? 🍏

택소노미는 그리스어로 분류하다(taxis)와 법·과학(nomos)을 뜻하는 단어가 합쳐진 것인데요. 녹색분류체계란 우리말에서 알 수 있듯이 친환경 산업을 선별·지정하고, 관련 투자를 지원해 투자 활성화를 돕습니다. 국가 연합 단위의 택소노미는 EU가 전 세계 최초로 시도 중입니다.

EU 택소노미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20년 6월이었습니다. 당시 EU 집행위는 ‘2050 기후중립(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EU 택소노미 규정을 채택했는데요.

같은해 11월 공개된 EU 택소노미 초안에는 원전과 천연가스는 포함돼 있지 않았습니다. 두 발전 방식이 EU가 정한 무해원칙(DNSH, Do No Significant Harm)에 위배된단 판단 때문인데요.

이 원칙은 EU 택소노미의 6대 환경목표인 ▲온실가스 감축, ▲기후변화 적응, ▲수자원 및 해양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과 보호, ▲순환경제로의 전환, ▲오염방지 및 통제, ▲생물다양성 및 생태계 보호와 복원 중 어느 하나의 목표에 기여하면서도, 다른 목표에 중대한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단 내용입니다.

허나, 초안 공개 직후 원전과 천연가스를 택소노미에 포함시켜야 한단 EU 회원국 간 물밑싸움이 시작됐는데요. 프랑스를 중심으로 폴란드·헝가리·체코 등 12개국은 원전을 친환경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룩셈부르크·덴마크 등 5개국은 반대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 2020년 EU 원전 현황왼 프랑스 쇼Chooz 원전오 전경 Eurostat 제공

치열한 논의 끝에 올해 2월 EU 집행위는 원전 및 천연가스를 EU 택소노미에 포함하는 기후위임법을 내놓았습니다. 두 에너지가 2050 기후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선 ‘과도기적 에너지’로 도움이 된단 견해를 반영한 것인데요.

당시 EU 집행위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과도기적 역할을 하는 기술로 원전과 천연가스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일 뿐, (두 에너지가) 지속가능한 기술이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EU 집행위는 이어 “기후중립을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며 안전성 등 전제 조건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을 제시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천연가스와 원전은 각각 2035년과 2045년까지 건설 허가를 받고 엄격한 배출 및 안전 기준을 준수하는 내용을 택소노미 최종안에 담았습니다.

 

👉 EU 택소노미 최종안에 구체적으로 담긴 내용은?

 

© 14일현지시각 EU 의회 경제위환경위원회는 찬성 76표반대 62표기권 4표로 원전천연가스 발전을 EU 택소노미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EU 환경위 트위터 갈무리

그러나 EU 집행위가 내놓은 최종안에 EU 의회 두 소위가 제동을 건 상황입니다.

덴마크 연기금인 아카데미커펜션(AkademikerPension)의 엔데르스 스켈데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원전이나 천연가스 같은 위험한 기술이 택소노미 자금 혜택을 받게 할 이유가 없다”며 “이를 택소노미에 포함시킨 실수를 바로잡는 것은 의회의 몫”이라고 말했는데요.

벨기에 브뤼셀에 소재한 싱크탱크 브뤼겔(Brugel)의 시몬 타글리아피에르타 선임연구원 또한 “(EU 집행위의) 실수를 바로잡는 중요한 단계다”라고 밝혔습니다.

 

© EU 의회 회의 모습 European Union 2021 Flickr

EU 의회 소위 결정에 회원국 반응 엇갈려 🇪🇺

EU 택소노미 결의안은 7월 EU 의회 본회의 표결에서 최종 결정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EU 의회 의원 중 절반 이상이 반대하거나, 27개 회원국 중 20개국이 반대하면 EU 집행위는 택소노미를 철회 혹은 수정해야 합니다. 찬성 의견이 더 많을 경우 원전과 천연가스를 포함한 EU 택소노미는 2023년 1월 1일부터 시행됩니다.

일단 EU 의회 소위 결정을 놓고 회원국 간 반응은 엇갈린 상황입니다. EU 의회 의원들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앞다퉈 여러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요. 현 상황을 간략하게 알아본다면.

  • 체코 🇨🇿: 체코는 EU 의회 소위 결정에 가장 반발하는 국가인데요. 2020년 체코는 전체 전력 생산량의 36.9%를 원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또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독립을 위해 추가 원전 건설까지 고려하는 만큼 반발이 심한데요. 이번 표결에 대해 체코 정부와 여당·야당 모두 유럽 에너지 안보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온드레지 코바지크 체코 EU 의회 의원은 표결 직후 “(이번 결정은) 투자자들에게 불확실성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녹색전환 및 에너지 가격 안전성에 필요한 투자를 늦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프랑스 🇫🇷: 프랑스는 체코와 함께 EU 택소노미에 원전 및 천연가스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국가인데요. EU 의회 산업연구에너지위원회(ITRE) 소속인 크리스토퍼 구블러 의원은 트위터에 “해당 반대를 철회하기 위해 7월에 만날 것”이란 게시물을 올렸는데요. 환경위 소속 오렐리아 비뉴 의원은 EU 집행위 택소노미 결의안이 의회 본회의에서 결의될 것을 촉구했습니다. 반면, 녹색당의 야닛 자도 EU 의회 의원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기후를 위한 승리”라며 이번 표결에 환영 의사를 밝혔습니다.
  • 독일 🇩🇪: EU 의회 최대의석(96석)을 보유한 독일은 지난 3월 말 택소노미 최종안에 공식적으로 반대성명을 발표한 바 있는데요. 이번 표결을 누구보다 환영하는 입장인 상황.

 

+ EU 의회 교섭단체 7개 중 5곳도 원전 및 천연가스 포함된 택소노미 최종안 반대 의사 밝혀 📢
EU 의회는 각국에서 선출된 정당과 별개로 의회 내에서 이념적으로 연대하는 교섭단체(Political group)을 구성해 활동할 수 있는데요. 의회에서 실질적인 정당 역할을 하고 있죠. 그간 7개 교섭단체 중 2개 단체가 EU 택소노미 최종안에 반대했는데요.

반대 그룹이 최근 5개로 확대된 상황. 지난 8일(현지시각) 유럽인민당·사회민주진보동맹·중도좌파 리뉴유럽·녹색당그룹·좌파그룹 등 5개 교섭단체는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원전과 천연가스를 포함시킨 EU 택소노미 최종안에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 European Union 2019 Flickr

세계원자력협회(WNA)는 표결 직후 “EU 의회가 다음달 본회의에서 실용적 행보를 보이기 바란다. 원자력이 택소노미에서 배제될 경우 유럽인들은 더 비싼 에너지 요금을 내야 한다”고 밝힌 반면, 그린피스 등 국제환경단체는 이번 표결에 환영한단 입장을 밝혔습니다.

한편, 이번 결정이 우리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몰리고 있습니다.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 원전 포함의 주요 근거 중 하나는 ‘EU 택소노미에 원전이 들어있다’는 것이기 때문인데요.

안전이란 전제조건이 갖춰지면 K-택소노미에 원전을 못 넣을 이유가 없단 것이 정부 입장입니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 또한 1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와 EU는 상황이 다르다”고 선을 그었는데요. 한 장관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변동성)을 원전에서 해결할 수 있는 만큼 어떻게 조화롭게 믹스할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