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내놓은 ‘수리권’ 확대 공약을 놓고, 해당 단어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국내에서 수리권은 여전히 생소한 단어인데요.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리권을 요구하는 행동이 활발했단 것, 알고 계셨나요? 이들 국가에서는 제품 수명을 연장하고 수리를 손쉽게 하도록 돕는 방안이 정책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는데요.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시민들이 저마다 고장난 물건을 가져와 수리할 수 있도록 돕는 ‘수리 카페(Repair Cafe)’가 존재합니다. 소비자 수리권 보호와 함께 지역사회를 묶어준 공동체 역할을 한다는데요. 이 수리 카페의 독특한 이야기를 준비해 봤습니다.

 

© 리페어 카페 재단을 설립한 마르티네 포스트마 Repair Cafe Foundation 제공

20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문을 연 ‘수리 카페’ 🔩

수리 카페는 20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했습니다. 환경학자이자 기자였던 마르티네 포스트마가 수리 카페를 만들었는데요. 그는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멀쩡하게 버려진 물건을 본 후 아이들에게 지속가능한 문화와 환경을 물려주고 싶단 생각에 수리 카페를 열었다고 합니다.

초기 수리 카페는 암스테르담의 한 영화관 로비를 빌려 팝업스토어 형태로 문을 열었는데요. 수리 카페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자 이후 시민문화회관을 빌려 정기적으로 운영하게 되죠. 수리 카페는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네덜란드 전역에 확산되는데요.

포스트마는 2011년 1월 아예 ‘리페어 카페 재단(Repair Cafe Foundation)’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수리 문화 확산에 힘을 쏟게 됩니다. 당시 재단은 네덜란드 정부와 재단으로부터 각종 성금을 통해 약 52만 달러(한화 약 6억원)이 기금을 받았고, 이를 수리 문화 확산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합니다.

재단이 설립된 이듬해인 2012년 네덜란드 각지에는 수리 카페는 30개였는데요. 2021년 1월 기준, 수리 카페는 영국·벨기에·독일·인도·일본 등 세계 각지로 퍼져 2,238개에 이르렀는데요. 한해 4만여개 제품이 수리되고, 약 3만 명의 봉사자가 활동 중입니다.

 

+ 수리 카페 확산에는 리페어 선언이 한몫했단 사실! 🔧
포스트마가 수리 카페를 운영하던 같은해,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플랫폼 21(Platform 21)’이란 네덜란드 비영리단체가 ‘리페어 선언(Repair Manifeto)’을 발표했는데요. 이 선언은 ‘기술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되며, 기술을 제대로 부릴 수 있어야 한다’는 호소가 담겼죠. 과잉 소비에 저항한단 뜻과 함께 수리가 재활용보다 더 효율적이라 주장한 선언은 여러 산업의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감을 주며 수리 문화 확산에 기여했다고.

 

© 네덜란드에 있는 수리 카페 모습 Repair Cafe 트위터 갈무리

어떤 물건이든 가지고 오면 수리할 수 있어! 🧰

수리 카페에서 고칠 수 있는 물건에는 제한이 없는데요. 구멍이 나서 버려진 옷부터 고장난 커피메이커나 이어폰, 자전거 등 각기 다른 물건을 수리할 수 있죠. 카페 안에는 이미 수리에 필요한 도구와 재료가 모두 준비된 상태인데요. 방문자들이 집에서 고장난 물건을 가져오면, 해당 제품의 수리 기술을 갖춘 전문가가 수리를 진행하죠.

수리 카페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로 구성돼 있는데요. 이들은 대개 한 달 동안 3~4시간씩 각자의 기술과 시간을 바친다고 합니다. 전문 기술자가 수리를 진행하는 동안 방문자들은 옆에서 수리 기술을 지켜보며 학습할 수도 있고, 아니면 차나 커피 등을 즐기며 수리나 DIY(Do it Yourself)에 관한 책을 흩어볼 수 있죠.

 

© 수리 카페에서 활동하는 기술자들도 모두 지역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다 Repair Cafe 트위터 갈무리

대개 방문자들이 가져온 제품은 성공적으로 수리가 되는데요. 전기전자제품은 평균적으로 55% 정도 수리되나, 기타 제품의 성공률은 85%로 수리성공률이 높다고 합니다. 수리비는 대부분 무료이고, 사용자들의 지불능력에 따라 자발적 기부도 받고 있죠.

혹여 물건을 고치지 못했을 경우 기술자는 해당 이유를 ‘리페어 모니터(RepairMonitor)’란 프로그램에 기록해야 하는데요. 리페어 모니터는 전 세계 수리 카페에서 기록된 수리된 제품·제품군·수리여부·방법 등을 주기적으로 공유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소비자와 제조업자에게 어떤 상품이 자주 고장났고, 고장이 잦은 상품을 피하는 방법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죠.

이밖에도 수리 카페에서는 정기적으로 봉사자들끼리 제품 수리를 위한 지식과 경험을 주고받는 워크숍도 열리는데요. 수리 카페가 세계 전역에 설치된 만큼, 카페마다 독특한 지역 문화가 형성된 것도 눈여겨볼 점이라고 합니다. 이는 수리 카페가 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이웃과 함께 풀어가고, 나아가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단 ‘수리 카페 운동’ 방향을 지키는 것이 원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라고 하죠.

 

© 2019년 8개국 수리 카페에서 가장 많이 수리된 상위 10위 제품군 RepairMornitor 2020

순환경제 전환 위해선 ‘수리 문화’ 확산돼야 해 ♻️

그렇다면 수리 카페에서 가장 많이 수리된 제품은 무엇일까요? 리페어 모니터가 2019년 네덜란드·영국·캐나다 등 8개국에서 기록된 1만 4,000여건의 수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수리된 제품은 바로 커피메이커였는데요. 이어 바지, 청소기, 램프, 자전거, 시계, 노트북 등 순으로 제품 수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재단은 상위 10위 안에 든 제품 모두 최근 몇 년간 거의 변함이 없었다고 설명했는데요. 최근 몇 년간 가정용 제빵기나 에어프라이어기 등을 수리하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당시 재단은 해당 정보를 공개하며 순환경제 전환을 위해선 수리가 가장 합리적임을 강조했는데요. 더불어 수리용이성을 높이기 위해선 제품군의 예비 부품 수명을 늘리고, 비용이 너무 비싸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등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지난해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문을 연 수리 카페 활동 모습 DEANZ 홈페이지 갈무리

그런 점에서 수리 카페는 일반적으로 비싸서 고장난 물건을 거의 무료로 수리해준단 점에서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데요. 지난해에는 뉴질랜드와 아일랜드에 수리 카페가 첫 선보였고, 미국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도 수리 카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직접 무언가를 고치는 일은 분명 의미있는 일입니다. 지속성을 경험하고, 책임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 주변의 사물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해주죠. 수리 비용이 비싸서 혹은 부품이 없어서 버렸던 물건을 다시 고쳐쓴단 것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 우리나라에도 수리 카페가 있을까? 🇰🇷
리페어 카페 재단에는 2곳이 등록돼 있는데요. 아쉽게도 한 곳은 사라진 지 오래고, 다른 곳은 서울새활용플라자에 있다고. 다만, 전자제품 수리만 가능했고 운영도 한시적이었는데요. 재단에 등록되지 않은 다른 수리 카페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을 기점으로는 운영을 하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