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날씨로 나들이객이 많아졌습니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 앞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곰인형이 등장해 인기인데요. 벚꽃 시즌에 인증샷 성지로 소문난 ‘어메이징 벨리곰’ 공공전시입니다. 벨리곰은 롯데홈쇼핑의 사내벤처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캐릭터입니다. 몰래카메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웃음을 주는 유튜브 콘텐츠에 등장하는데요.

이번 프로젝트는 2014년 석촌호수에 등장했던 초대형 러버덕에 이은 세 번째 프로젝트입니다. 러버덕 전시에는 73만 명이, 2016년 석촌호수의 슈퍼문 전시에는 106만 명이 방문했는데요. 이번 프로젝트는 단 2주 만에 방문자가 2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하죠.

초대형 캐릭터 전시가 인기를 끄는 건 한국만이 아닙니다. 이탈리아 한 산골짜기에는 구글어스에 보일 정도로 큰 초대형 토끼 인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형, 조금 수상합니다. 썩어가는데도 내버려두고, 배는 한 쪽이 툭 터져 파랗고 빨간 조형물이 흘러나와 있는데요. 대체 무슨 사연인 건지, 그리니엄에서 찾아봤습니다.

 

© 이탈리아 콜레토바파 산에 설치된 거대 토끼 인형, 2005년 촬영 모습_Gelitin

이탈리아 거대 토끼를 둘러싼 미스터리 🐰

초대형 캐릭터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즐겁게 하고, 동심으로 되돌립니다. 크면 클수록 놀라움과 귀여움은 더욱 배가 되는데요. 길이가 60m, 대략 아파트 20층 높이에 달하는 토끼 인형이라면 어떨까요? 잠실에 놓인 벨리곰의 높이가 아파트 5층과 비슷한 15m이니 그보다 4배는 큰 셈인데요. 분명 누구나 한번쯤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할 겁니다.

이 거대 토끼 인형은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트 지역의 콜레토파바(Colletto Fava) 산, 해발 1,500m의 공터에 놓여 있습니다. 주변에 관광지라곤 전혀 없는 시골. 그럼에도 마이크 카스티요는 일전에 들었던 초대형 토끼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스페인에서 이 산골짜기까지 날아왔습니다. 기대를 잔뜩 안고 찾아간 콜레토파바산.

그러나 그곳에 토끼 인형은 실오라기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구글 지도를 켜 불만을 털어놓았죠.

“사기당한 기분이야. 그곳엔 토끼가 없었어.(Me siento estafado. No está el conejo.)”

마이크 카스티요(Mike Castillo)

이 사례는 구글 지도에 올라온 후기에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구글 지도의 해당 장소에는 마이크의 댓글과 비슷한 댓글들이 다수 남아있는데요. 1년 전, 9개월 전, 이곳을 방문했지만 토끼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의 실망이 그대로 드러나 있죠.

전시 기간이 끝나서 치운 걸까요? 하지만 댓글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져듭니다. 바로 2주 전에도 거대한 분홍 토끼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 바로 2주 전에도 거대한 분홍 토끼를 봤다는 후기가 올라와 있는데요. 설마,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처럼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토끼라도 되는 걸까요?

 

© 거대 토끼 인형 설치하는 모습, 2005년 촬영 모습_Gelitin

2005년, 하늘에서 거대한 토끼가 떨어졌다 🐇

이 거대한 토끼 인형 작품의 이름은 “Hase / Rabbit / Coniglio.” 왼쪽부터 각각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로 토끼를 뜻하는 단어인데요.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4명의 아티스트로 구성된 예술가 그룹 젤리틴(Gelitin)은 거대한 토끼 인형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1999년부터는 토끼 인형을 덮을 천을 만들기 위해 50명의 여성들이 뜨개질을 뜨기 시작합니다. 워낙 초대형 인형이라, 뜨개질에만 5년 가까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속은 지푸라기로 채운 덕에 푹신한 인형 위에서, 방문한 사람들은 앉거나 누워 편히 대화하거나 하늘과 자연을 바라보며 쉴 수 있었죠.

젤리틴은 (예비)방문객들에게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이 토끼 인형이 앞으로 ‘20년 동안’ 여러분을 기다릴 것이라 말했는데요.

 

© 초기 드로잉_Gelitin

거대하고 지푸라기로 가득 찬, ‘썩어가는’ 토끼 🕵️

네. 20년입니다.

젤리틴이 제작한 이 토끼 인형은 전시가 시작된 2005년부터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콜레토파바산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겨울에는 눈을 맞았고 해를 거듭할수록 분홍 천은 거뭇거뭇하게 때가 탔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자 헤진 틈으로 지푸라기가 드러나며 토끼는 천천히 찢어지고 분해되고 썩었죠.

젤리틴은 사람들이 이 대형 토끼가 천천히 썩어가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볼 수 있길 원했습니다. 낡아 헤지고 부스러지며 부패하는 냄새가 나는 것까지도요.

 

© 2005년부터 2011년까지의 모습_Gelitin

애초부터 젤리틴은 이 토끼 인형이 사람들에게 ‘인증샷’거리로 소비되지 않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토끼 인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옆구리에는 빨갛고 파란 장기들이 흘러나와 있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이 오브제는 언뜻 기괴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이 거대 토끼를 그저 예쁜 토끼가 아니라 ‘살아있던 무언가’로 느낄 수 있게 되죠. 그런 토끼 인형이 비바람을 맞고 썩고, 그 자리에는 다시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 콜레토파바 산, 토끼가 놓였던 자리에는 흔적만 남아 있다_Google 지도

콜레토파바산에는 토끼 인형이 있고, 없다? 🏔️

당초 젤리틴은 토끼 인형이 2025년까지는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인형은 2016년 즈음에 거의 다 분해됐다고 하는데요. 2022년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거대한 토끼 인형을 보았다는 후기와 보지 못했다는 후기가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은 이 때문입니다. 콜라토파바산과 하나가 된 토끼 인형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죠.

이처럼 천천히 사라져가는 토끼 인형은 기존의 공공전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기간이 끝나 조형물이 철거되면 그 자리는 깨끗해 보일지 몰라도, 전시가 끝나고 폐기되는 조형물들은 그 자체로 환경발자국이기 때문이죠.

최근 전시업계에서도 전시회의 폐기물 문제를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전시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 우리나라에서도 또다른 ‘거대 토끼 인형’을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